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앞 담벼락에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 서울서부지부 명의로 양승태와 관련자를 구속하라라는 펼침막이 걸려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사법부는 독립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인권보장의 최후 보루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다. 국민께 끼쳐드린 심려와 상처에 대해 가슴 깊이 반성한다.”
참여정부 들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권위주의 정권 시절 인권침해 등 ‘과거사 청산’ 바람이 불었다. 수사기관의 고문·불법구금으로 만들어진 조작 간첩 사건을 판결로써 ‘완성’했던 법원도 과거사 청산을 요구받았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2005년 9월 취임사에서 부끄러운 과거를 사과했다. 대법원이 택한 청산 방식은 ‘재심’과 ‘국가 손해배상’이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가 처음으로 재심을 권고한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등의 형사 재심에서 2008년 1월 무죄가 선고됐다. 소멸시효로 막혀있던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가족들의 손해배상 청구도 대법원은 2011년 6월 “진상을 은폐한 국가가 이제 와서 뒤늦게 미리 소를 제기하지 못하는 것을 탓하는 취지로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하여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한다”는 판결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법관들은 ‘돈’에 민감했다. 과거사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가 이어지자 손해배상금을 깎을 길을 판례로 열어주기 시작했다. 먼저 이자를 대폭 줄였다. 대법원 3부(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2011년 1월13일 “현저한 과잉배상의 문제가 제기된다”며 “불법행위 시와 변론종결 시 사이에 장기간에 세월이 경과되어 통화가치 등에 상당한 변동이 생긴 때에는, 불법행위로 인한 위자료 배상채무의 지연손해금(이자)은 사실심 변론종결 당일로부터 발생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위자료 이자 산정 시점을 불법행위가 발생한 때가 아니라,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사실심(2심) 변론 종결일로 늦춘 것이다. 이 판결로 조용수 사장의 유가족이 받을 이자는 69억8000만원에서 2000여만원으로 크게 줄었다.
2011년 9월 양승태 대법원장이 취임한 뒤 다시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는 ‘역주행’이 본격화됐다. 손해배상 청구 자체를 막기 시작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 첫해인 2013년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병대 대법관)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일로부터 ‘3년 안에’ 소송을 제기하지 못했거나, 애초 진상규명을 신청하지 않은 피해자들은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그 연장 선상에서 대법원 1부(주심 박병대 대법관)는 같은 해 12월12일에는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조작 간첩 등 인권침해 사건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도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소를 제기하면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결했다. 재심 무죄 판결로 받게 되는 형사보상금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이 지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민주화운동 관련자와 박정희 정권 긴급조치 피해자도 법원의 ‘역주행’ 탓에 ‘대형 참사’를 당해야 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5년 1월22일 “민주화운동 보상심의위원회의 보상금 등 지급 결정에 동의한 때에는 재판상 화해와 동일한 효력이 미친다고 볼 수 있다”며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관 13명 중 5명이 “보상금 액수가 다른 과거사 사건 피해자의 위자료 액수에 비해 현저하게 적음에도 이제 와서 그동안의 대법원 판결과 달리 재심 무죄 판결이 확정된 사정을 도외시하고 손해배상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은 공평과 정의의 관념에 배치됨이 분명하다”며 반대했다.
나아가 2015년 3월26일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긴급조치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 행위로서 국민 개개인에 대한 관계에서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없다”며 손해배상 대상이 아니라고 명시했다. 2010년과 2013년 긴급조치가 위헌이므로 무효라는 대법원 판결 취지를 허무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과거사 피해자들은 고문과 억울한 누명의 고통에 이어 국가배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거나, 1심 판결 뒤 미리 받은 배상금을 이자까지 붙여 돌려줘야 하는 ‘돈 고문’을 당하는 등 국가의 ‘2차 폭력’에 시달렸다. 하지만 양승태 대법원 시절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이런 ‘과거사 역주행 판결’들을 “과거 왜곡의 광정”, “박근혜 대통령 국정운영 뒷받침 사례”로 포장해 청와대와 거래를 시도했다.
헌법재판소가 30일 다시 소멸시효와 배상 범위를 일부 넓히는 ‘위헌 결정’을 내놓으며 과거사 청산 역주행에도 제동이 걸리게 됐다.
김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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