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이진성 헌법재판소장이 31일 오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중앙홀에서 열린 헌재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순 한글로 작성된 헌법책에 서명한 뒤 책을 들어 보이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헌법재판소가 최근 수년째 쥐고만 있던 주요 ‘난제’들에 위헌을 선언하는 등 ‘기본권 보장 최후 보루’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헌재 안팎에서는 지난해 재판관 2명이 바뀌면서 위헌·합헌 구도에 변화가 찾아왔다는 분석이 나온다. 헌법재판관 구성의 중요성이 새삼 확인됐다는 것이다. 조만간 소장과 재판관 5명이 바뀌게 될 ‘6기 재판부’가, 역대 가장 많은 위헌을 선고했던 1기 재판부처럼 적극적인 헌법 해석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헌재는 30일 재판관 6 대 3 의견으로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과 간첩 조작 사건 등 국가폭력 손해배상 사건에 소멸시효(불법행위가 있은 날로부터 5년)를 적용하는 법 조항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또 재판관 7 대 2 의견으로 국가로부터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받았더라도 이를 국가와 화해한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며 민주화운동보상법에 일부 위헌을 선언했다. 두 사건은 과거사 사건의 손해배상 청구 범위를 크게 줄인 대법원 판결 전후로 헌재에 접수됐다. 심리에만 4년여가 걸렸다. 역시 같은 날 헌재는 재판관 6 대 3 의견으로 수사기관의 ‘패킷감청’ 근거가 된 통신비밀보호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를 결정했다. 과거 헌재가 심리를 5년간 끌다 당사자가 세상을 떠나 심판을 종료해 비판을 받았던 사건이다.
이처럼 최근 주요 사건 위헌 결정은 재판관 ‘6 대 3’이나 ‘7 대 2’ 구도가 자주 나타나고 있다. 7년을 끌었던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 헌법불합치 결정도 ‘6 대 3’이었다. 박한철·이정미 재판관 후임으로 이선애·유남석 재판관이 임명됐는데, 두 사람은 양심적 병역거부 등 주요 사건에서 위헌 쪽 입장에 서고 있다. 재판관 9명 중 과반(5명)이 아닌 최소 6명의 뜻을 모아야 위헌 결정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헌법재판 구도에 ‘결정적 변화’가 찾아온 셈이다. 헌재 관계자는 31일 “대통령 탄핵심판 이후 재판관 2명이 교체되면서 5명의 재판관이 뜻을 모으는 일이 많아졌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유연한 서기석·안창호 재판관이 ‘합류’하면 위헌 결정이 났다. 반면 이런 분위기 속에서 김창종·조용호 재판관은 과거보다 더 보수적인 입장을 보이는 모양새”라고 풀이했다.
여기에 ‘재판관 9명 완전체’를 한동안 이루지 못한 탓에 주요 사건 처리를 미뤄왔던 헌재가 지난해 11월 유남석 재판관이 취임하며 심리에 속도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영향을 끼쳤다. 9월19일 재판관 5명 동시 퇴임을 앞두고 임기 6년간 묵혀뒀던 ‘숙제’를 해야 한다는 부담도 ‘위헌 창고 대방출’의 배경으로 꼽힌다.
이날 이진성 헌재 소장은 헌법재판소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헌재 결정은 모든 국민에게 효력을 미칠 만큼 막중하다. 앞으로 헌재는 보수와 진보의 분류에 휩쓸리지 않는 균형감각을 통해 결정의 설득력을 높이겠다”고 밝혔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