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에서 실시하는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설문지를 보면, ‘인공임신중절 허용시 사회변화’를 묻는 항목에 4개 문항 가운데 3개에 ‘성 문란’, ‘생명 경시’ 등 부정효과를 나열해 놓았다.
보건복지부가 진행할 예정인 인공임신중절(낙태) 관련 설문조사의 문항 설계에 편향성이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복지부가 만든 설문조사 문항을 미리 접한 여성단체와 전문가들은 문항의 편향성을 이유로 자문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낙태죄가 존치돼야 한다’는 결론을 염두에 둔 조사 문항이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2일 <한겨레>가 입수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설문지’를 보면, ‘인공임신중절 허용사유를 확대한다면 우리 사회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냐’는 주제의 세부 질문 문구로 (1)인공임신중절이 늘어날 것 (2)책임지지 않는 성관계로 성문화가 문란해질 것 (3)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해질 것 등을 제시했다. 총 4가지 세부 질문 항목 가운데 3가지에 부정적인 인식을 담았고, 나머지 질문 항목 1가지로 (4)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높아질 것’을 제시했다. 응답자들은 각 세부 질문에 ‘전혀 동의하지 않음’, ‘별로 동의하지 않음’, ‘대체로 동의함’, ‘매우 동의함’을 선택하도록 설계됐다.
여성계에서는 이런 질문 설계 자체가 ‘임신중절=생명 경시·성 문란’으로 보는 기존 보수적인 인식을 답습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복지부의 자문 요청을 받은 여성단체의 한 관계자는 “2017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여성 인식조사 등을 비롯해 다른 연구에서는 낙태를 경험한 여성이 ‘임신중절 후 안도감을 느꼈다’고 답하는 등 낙태 이후 여성이 느끼는 여러 긍정적인 효과를 제시했다”면서 “그에 비해 복지부 설문조사는 긍정적인 효과로 ‘여성의 지위 향상’만 제시됐을 뿐 낙태를 부정적으로 보는 항목만 세 가지다. 복지부의 (부정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을 비롯한 71개 단체가 지난 7월7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낙태죄 위헌 결정과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전국총집중집회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특히 여성계는 설문지에 여성의 건강권 문제가 제대로 담기지 않은 점도 심각한 문제로 보고 있다. 여성들이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핵심적인 이유 중 하나가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안전하게 인공임신중절을 받게 해달라’는 것인데, 설문지는 이런 요구를 빼놓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이번 실태조사를 촉발한 청와대 국민청원의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부탁드립니다’라는 글에도, 청원자는 “불법 낙태 수술을 받으면 자칫 사망에 이를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하다”고 청원 이유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설문 문항에는 낙태 경험 여성에게 ‘자궁 천공, 자궁유착증, 습관성 유산, 불임 등 신체적 증상’과 ‘죄책감, 우울감, 불안감, 두려움, 자살 충동 등 정신적 증상’ 등을 겪었는지만 묻고 있다. 여성단체 관계자는 “낙태죄 때문에 여성의 건강권이 어떻게 침해당하고 어떤 건강상의 위험에 놓여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지 않다”라고 평가했다.
복지부의 이번 실태조사는 시작부터 “정부가 결론을 정해놓은 게 아니냐”는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복지부가 지난 1월 실태조사를 위해 내놓은 연구용역 입찰 제안서에 ‘연구 목적’으로 ‘인공임신중절 예방 및 제도 개선’이라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연구목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조사 방향이 달라질 수 있는데, 복지부의 실태조사는 그 목적을 인공임신중절 예방이라고 밝히고 있어 인공임신중절에 문제가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며 “인공임신중절에 대한 전형적인 태도나 관습을 반영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복지부 출산정책과 관계자는 “여성계와 법조계, 종교계 등 다양한 입장을 포괄적으로 반영하는 과정에서 각계의 요구를 100% 반영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며 “아직 초안일 뿐이므로 여러 목소리를 담아 수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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