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대법원 법원 전시관 안에 법관의 양심과 독립 등을 명시한 헌법 제103조가 적혀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 민사소송규칙 제134조의2(참고인 의견서 제출)
①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는 공익과 관련된 사항에 관하여 대법원에 재판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고, 대법원은 이들에게 의견서를 제출하게 할 수 있다.
② 대법원은 소송관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공공단체 등 그 밖의 참고인에게 의견서를 제출하게 할 수 있다.
양승태 대법원은 2015년 1월 초 대법관 14명이 진행하는 대법관회의를 거친 끝에 이런 규정을 하나 만들었다. 대법원에서 진행되는 일부 민사 재판에서 ‘제3자’인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내용의 ‘민사소송규칙’이다.
2016년 10월, 대법원은 이 규칙을 ‘백분’활용한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상고심에서 외교부에 의견서를 내게 한 것이다. 이 소송은 ‘징용 피해자’와 ‘전범기업’ 사이 개인 분쟁이어서, 외교부는 소송 당사자가 아니었다. 실제 외교부는 “(전범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면) 한·일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 것”, “한국은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는 나라로 인식돼 과거사 문제에서 갖고 있던 도덕적 우월성까지 잃게 될 것”, “한국의 대외신인도가 손상될 것” 등 견해를 담은 의견서를 냈다.
최근 법조인들 사이에서는 이 규칙이 내용 면에서나 개정 방식 면에서나 위법하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규칙 개정이 문제적인 4가지 이유를 들여다봤다.
■①국가, 민사소송 ‘개입’할 길 열렸다= 민사소송은 개인 사이의 다툼이다. 국가기관도 민사소송에서는 철저히 민간인과 같은 지위일 뿐이다. 또 재판, 특히 민사재판은 당사자들이 주장하는 범위 안에서 판단하는 게 원칙이다. 재판과 관계가 없는 ‘제3자’가 탄원서나 진정서를 내도, 그야말로 ‘참고사항’일 뿐 법적 구속력이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부에 이 부회장의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냈지만, 그야말로 박 전 대통령의 ‘희망사항’일 뿐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하지만 이번 민사소송규칙을 통해 대법원은 ‘제3자’인 정부가 재판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터줬다. 국가기관이 소송 당사자나 재판 쟁점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도, ‘공익’이라는 명분에 따라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게다가 ‘공익’의 범위도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국가기관이 “대한민국의 위상이 떨어질 수 있다”, ‘“대외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 “국가에 재정적 부담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며 ‘국익’을 앞세워 의견을 내도 막을 길이 없다. 재판부가 직접 요청하지 않은 경우라도, 국가기관의 공식 의견이 접수된 이상 대법관들의 판단도 영향받을 수 있다. 한 판사는 “국가기관의 의견은 다른 참고인의 의견과 무게감이 다르다. 국익에 치우친 판결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 셈”이라고 했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2016년 9월6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전국법원장회의에서 '부장판사 뇌물수수 구속'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마친 뒤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②반박 ‘봉쇄’된 재판에 정부의견 일방제출= 통상 변론이 열리지 않아 ‘공개반박’이 어려운 대법원 재판에서, 국가기관이 서면으로 일방적 주장을 펼칠 ‘꼼수’를 마련해줬다는 지적도 나온다.
1·2심에서 진행되는 민사재판에는 제3자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여럿 마련돼 있다. 관계자를 증인으로 신청할 수 있고, 일부 사건에서는 법원이 지정하는 전문심리위원의 의견을 들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소송 상대방도 법정에 나온 증인을 상대로 반대신문을 펼치게 된다. 모두 공개 법정에서 공개 변론이 열리기에 가능한 일이다.
대법원 재판의 경우 사정이 조금 다르다. 대법원 재판은 원칙적으로 절차와 법리만 놓고 따지는 법률심으로 진행된다. 즉, 웬만해선 변론도 열지 않고 대부분 서면만 주고받는다. 대법원의 공개변론은 그 자체로 뉴스가 될 정도로 드문 일이다.
하지만 이번 소송규칙 개정으로 이같은 원칙도 일부 금 가게 됐다. 당사자들이 주장하지도 않은 내용이 국가기관의 의견서를 통해 난데없이 ‘쟁점’으로 대두될 가능성이 열렸다. 게다가 통상 대법원은 변론을 열지 않기 때문에, 민사소송 한쪽 당사자가 정부 의견서를 내도 상대방이 반대신문을 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대법원에서 제3자의 의견을 듣고자 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다만, 기존에도 대법원이 제3자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이미 있었다. 쟁점을 명쾌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을 때(‘소송관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참고인의 진술을 들을 수 있다. 이때도 서면을 통한 방식은 아니다. 소송당사자들이 참여한 상태에서, 변론을 열어야 한다. 공개 법정에서 상대방의 반박 기회를 보장한다는 취지다.
■③법률 아닌 ‘깜깜이’ 규칙 개정= 소송규칙 개정 방식도 위법하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이 규칙은 2015년 1월 대법관 14명(대법원장 포함)만 참여하는 대법관회의를 거쳐 개정됐다. 대법원 근무 경험이 있는 한 판사는 “개정된 규칙은 여러모로 상위법인 민사소송법에 위배되는 내용이다. 이런 경우 법률 자체를 손보는 게 마땅하다. 상위법인 법률에 없는 내용을 하위법인 규칙에 임의로 집어넣은 것은 위법하다”고 짚었다.
◎ 민사소송규칙 제134조의2(참고인 의견서 제출)
①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는 공익과 관련된 사항에 관하여 대법원에 재판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고, 대법원은 이들에게 의견서를 제출하게 할 수 있다.
② 대법원은 소송관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공공단체 등 그 밖의 참고인에게 의견서를 제출하게 할 수 있다.
비슷한 내용을 담은 다른 규정과 비교하면 문제점은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앞서 ‘변론을 통해 참고인의 진술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은 법률인 민사소송법에 근거가 마련돼 있다. 하위법인 규칙은 “민사소송법 규정에 따라, 참고인 진술을 듣는 때에는 당사자를 참여하게 해야 한다”며 그 구체적 절차를 안내할 뿐이다. 대법원 재판에 ‘예외’를 두는 내용인 데다가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와 직접 관련된 내용인 만큼, 상위법에 근거를 둔 것이다.
◎ 민사소송규칙 제134조(참고인의 진술)
①법 제430조제2항의 규정에 따라 참고인의 진술을 듣는 때에는 당사자를 참여하게 하여야 한다.
민사소송법 제430조(상고심의 심리절차)
②상고법원은 소송관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특정한 사항에 관하여 변론을 열어 참고인의 진술을 들을 수 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공개변론을 통해 국가기관 진술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이미 있는데도, 대법원은 굳이 ‘서면(의견서) 제출’ 방식을 만들었다”며 “공개변론에서 국가기관이 한쪽에게 불리한 내용을 진술하게 하는 게 부담스럽기 때문 아니겠냐”고 짚었다.
일제강제 동원 피해자 이춘식(98) 할아버지가 지난달 22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열린 ‘양승태 대법 재판거래 규탄 및 일제 강제동원 피해 소송 전원합의체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을 마치고 기자회견문을 제출하기 위해 청사로 향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④징용소송 ‘맞춤형’ 로드맵이었다= 무엇보다 규칙이 개정된 ‘맥락’을 들여다 보면, ‘상고심 심리의 충실화’를 위해 소송규칙을 개정했다는 대법원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외교부 입장을 ‘서면’으로 재판에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을 신설하기 위해 노력할 예정” (2013년 9월, 행정처 사법정책실)
“신일철주금 사건에서 외교부 입장을 반영할 방법을 마련했다.”(2015년 9월, 사법지원실)
“외교부로부터 의견제출 절차 개시 시그널을 받으면 대법원은 피고 쪽으로부터 정부 의견 요청서를 접수받아 이를 외교부에 그대로 전달할 예정” (2016년 9월,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
법원행정처와 외교부 문건을 종합해 보면, 규칙 개정은 징용소송 ‘맞춤형’이었다. 규칙 개정 당시 대법원에는 전범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소부 판결이 같은 취지의 하급심을 거쳐 다시 접수된 상황이었다. 양승태 대법원은 박근혜 청와대로부터 해당 판결을 파기해달라는 요청을 지속적으로 접수했지만, 별다른 사정 변경이 없던 터라 스스로 내린 판결을 소부에서 ‘셀프부정’할 명분이 마땅치 않았다.
행정처는 2013년경부터 ‘외교부 의견서를 통해 새로운 쟁점을 제시하고, 이를 이유로 전원합의체에 회부한 뒤 판결을 파기한다’는 시나리오를 만든다. 대법원 판결이라도 판례 변경이 필요하면 전원합의체에 회부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소송규칙을 개정해 외교부가 개인 간 소송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터주고, 이를 빌미로 판결을 뒤집는다는 로드맵이었다. 실제 2016년 11월 외교부가 대법원에 의견서를 낸 직후 대법원은 전원합의체 회부를 검토했다고 했다. 대법원은 지난 7월말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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