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은 지난달 한 합의부 배석판사 2명을 모두 교체했다. 앞서 이 합의부 배석판사가 재판장인 부장판사와 갈등을 겪었고, 그 내용이 법원 고충처리위원회에 공식 접수됐다. 지난해 판사회의규칙이 개정되면서 법원장은 소속 법관의 고충을 처리하는 기구를 둘 수 있게 됐다. 법원은 당사자 의견을 듣고 조사를 거쳐 처음엔 배석판사 사무실을 부장판사 사무실 옆에서 다른 층으로 옮기도록 했다. 그 다음엔 재판부 운영도 일정 기간 중단했고, 지난달에는 아예 재판부를 새로 구성하기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법원 안팎에선 판사들 사이에 입으로만 전해지던 이른바 ‘벙커’의 존재를 법원 공식기구가 ‘인정’한 첫 사례라는 말이 나온다.
합의부를 구성하는 부장판사와 좌·우 배석판사 사이의 ‘갈등’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판사들은 함께 일하기를 꺼리는 부장판사를 골프장 모래구덩이에 빗대 ‘벙커’라고 부른다. 벙커의 유형도 다양하다. 판결문 작성을 까탈스럽게 챙기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업무형 벙커’, 점심·저녁식사를 늘 함께하길 바라는 ‘생활형 벙커’ 등이 있다. <한겨레>에 연재됐던 현직 판사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드라마 <미스함무라비>에서 출세를 위해 과도한 업무지시를 하는 ‘성공충’ 부장판사가 등장했는데, 그는 ‘업무형 벙커’에 가깝다. 최근엔 역으로 부장판사들이 배석으로 두기 싫어하는 판사를 이르는 ‘벙키’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판사들 사이에선 그동안 쉬쉬하던 ‘합의부 갈등’을 공론화한 것 자체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법원조직법은 모든 판사를 동등한 권한을 가진 독립된 헌법기관으로 본다. 하지만 지금껏 부장판사가 배석판사를 가르치는 도제식 교육과 위계서열, 관료적 조직 문화가 여전했고, 그 결과 ‘벙커’가 생겼다는 지적이 많았다.
5일 한 판사는 “법원장은 합의부 재판장인 부장판사 의견을 들어 배석판사 인사평가를 한다. 배석은 부장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부장도 자신이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배석을 쪼아 성과를 내려 한다”고 말했다. 판사들은 다면평가를 ‘벙커 탈출’ 대안으로 보고 있다. 다른 판사는 “경력법관 임용이 늘면서 ‘당하지만’ 않고 제 목소리를 내는 판사가 계속 나올 것으로 보인다. 판사들이 동등한 관계가 되려면 대등재판부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법원 고충처리위의 결정을 두고는 ‘처분 대상이 바뀌었다’는 불만도 법원 일부에서 나온다. 한 판사는 “문제를 제기한 배석판사가 아니라 갈등의 원인을 제공한 부장판사가 바뀌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법원은 배석판사들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김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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