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대법원 법원 전시관 안에 법관의 양심과 독립 등을 명시한 헌법 제103조가 적혀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구실’이 됐다는 중요사건 보고제도를 폐지하고 관련 제도를 손보기로 결정했지만, 대법원에 반하는 하급심 판결을 틀어막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의혹이 제기된 ‘패스트트랙’ 관련 규정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6일 대법원은 각급 법원이 중요사건의 접수와 처리 결과를 법원행정처에 의무적으로 보고하도록 한 대법원 규칙 ‘중요사건의 접수와 종국 보고에 관한 예규’(중요사건 예규)를 전면 폐지하면서, 관련 규정인 ‘적시처리 필요 중요사건의 선정·배당에 관한 예규’(적시처리 예규)도 손보기로 했다. 적시처리 선정이 가능한 사건의 범위를 각급 법원에서 자율적으로 선정하도록 한다는 취지다.
다만 대법원은 적시처리 예규의 ‘패스트트랙’ 관련 규정은 바꾸지 않을 방침이다. 2015년 10월 적시처리 예규가 6년 만에 개정되면서 “사건배당 주관자(법원장, 수석부장판사 등)는 (재판장 등) 요청이 없는 사건이라도 적시처리 사건으로 선정할 수 있다”, “(한번) 적시처리 사건으로 선정되면 상급심에서도 적시처리 사건으로 선정해야 한다”는 내용이 새로 담겼다. 문제는 예규가 개정된 시점이다. 이 규정은 그해 9월 서울중앙지법 민사11부(부장 김기영)가 박정희 유신 시절 긴급조치 9호 국가배상 판결을 내린 직후 만들어졌다. 그해 3월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라며 국가 책임을 부인한 대법원 3부(권순일·박보영·민일영·김신) 판결에 정면 반하는 내용이었다. 대법원은 당시 김 부장판사에 대한 징계를 검토하면서 “1심에서 대법원 판례를 위반하는 판결이 나오면 2·3심을 ‘적시처리 사건’으로 선정하고 최대한 빨리 진행해 논란 확산을 막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실제 문건 작성 20여일 뒤 예규가 6년 만에 개정되면서 ‘패스트트랙’ 규정이 추가됐다. 재판부 의사와 무관하게 법원장이나 수석부장판사가 사건의 ‘처리속도’를 조절하는 것으로, 문건 계획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다. 당시 예규 개정권자는 박병대 법원행정처장이었다.
제때 처리해야 할 사건의 지연을 막겠다는 취지지만, 법조계 안팎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법원장이나 수석부장판사 등 재판을 담당하지도 않는 이들이 사건의 ‘속도’를 조절하면서, 사법행정권이 남용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시간에 쫓긴 나머지 사건 당사자들 의사와 무관하게 사건을 ‘졸속 처리’할 수 있다”고도 짚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사건은 심급별로 판단하는 게 원칙인데, 한번 적시처리 사건으로 선정됐다고 해서 비슷한 속도로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며 “1심에서 적시처리 사건으로 선정되더라도 2심에서 다시 한번 적시처리가 필요한지 여부를 검토하도록 함으로써 사법행정권 남용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도 지적했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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