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추행 이후에도 피해자가 가해자의 지시에 따르고 가해자와 계속 근무했다는 등의 이유로 피해자의 진술을 못 믿겠다고 밝힌 하급심 판결이 잘못됐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피해자의 행동이 피해자답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성폭행 사건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과 비교해 주목된다.
대법원 2부(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같이 근무하던 간호사를 세 차례에 걸쳐 강해 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경기도 용인 ㅇ 병원 원장 ㄱ(63) 씨 사건 상고심에서 ㄱ 씨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하고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령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고 12일 밝혔다. ㄱ 씨는 1심에선 피해 간호사 ㄴ 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파기돼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에선 유일한 직접증거인 피해자 ㄴ 씨 진술의 신빙성이 쟁점이었다.
1심 재판부는 △방음이 되지 않아 소리만 쳐도 들을 수 있는 간호사실 뒷방에서 반항을 누르고 강제키스를 했다는 진술은 믿기 어렵고 △병원 약국에서 강제추행을 당한 뒤 30분도 지나지 않아 가해자가 불 꺼진 진료실에서 부른다는 이유로 순순히 진료실에 들어간 것은 강제추행을 당한 직후 ‘통상의 피해자가 취하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고 △강제추행 이후 오히려 가해자 전담간호사로 근무 변경을 희망해 10개월 이상 함께 근무한 것은 ‘상식’에 비춰 납득하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로, ㄴ 씨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또 피해자가 병원을 그만두면서 강제추행으로 고소한 경위도 석연치 않다며 병원 원장 ㄱ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진술의 주요 부분이 일관되면 사소한 사항의 진술에 다소 일관성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진술의 신빙성을 함부로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전제한 뒤, “피해자는 추행 경위와 추행 종료 이유 등에 대해 구체적이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는 특히 피해자 ㄴ씨가 2차 강제추행 30분 뒤 가해자 ㄱ씨가 부르는 진료실 안에 들어간 것에 대해, “원장 ㄱ 씨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경우 더 큰 위해가 올까 두려운 마음에 ㄱ씨가 주겠다는 물건만 빨리 받기 위해 진료실에 들어간 것이라는 ㄴ 씨의 진술이 납득된다. 피해자가 스스로 피고인 ㄱ씨가 있는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2심 재판부는 또 피해자 ㄴ씨가 강제추행 직후 병원을 그만뒀다가 3~4개월 뒤 병원 요청과 어려운 형편 때문에 복직했지만, 병원장의 전담 간호사가 아닌 외래담당 간호사로 근무한 것이며 그것도 피해자의 희망이 아니라 병원 쪽의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는 첫 강제추행이 벌어진 간호사실 뒷방도 소리가 들리거나 사람이 오가는 쪽이 아닌 반대쪽 벽에서 강제추행이 벌어진 데다 환자가 없는 야간에 벌어진 범행이어서 짧은 시간에 강제추행이 충분히 가능하다며, “당시 그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의 구체적이고 일관된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할 사정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처음에는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고 괴로워서 뒤늦게나마 고소를 결심하게 됐다는 피해자의 고소 경위에도 석연치 않은 점은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원심의 이런 판결에 잘못이 없다고 판단했다.
여현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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