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청사 1층에서 열린 헌법재판관 퇴임식에서 이진성 헌법재판소장 등 퇴임하는 재판관들이 가족들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있다. 헌법재판소 제공
이진성 헌법재판소장과 김이수·김창종·안창호·강일원 재판관 등 헌법재판관 5명이 6년 임기를 마치고 19일 오후 퇴임했다. 그러나 후임 임명이 늦어지면서 헌법재판관 9명 가운데 5자리가 비는 ‘4인 재판관 체제’를 맞게 됐다.
이진성 헌법재판소장은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청사 1층 대강당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헌법재판소는 헌법재판권을 가진 기관이지만 그것은 권력이나 권한일 수 없다. 재판다운 재판을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일 뿐이다. 권력으로 생각하는 순간 삼가지 못하고 오만과 과욕을 부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의 이런 언급은 재판거래와 사법농단 의혹을 겪는 대법원을 겨냥한 것으로도 해석돼 눈길을 끈다.
이 소장은 또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구성에 관하여 어떠한 권한도 없다. 이 점에서 재판관 지명 권한을 가진 국가기관의 입김에 흔들릴 것을 염려하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그 권한이 없는 까닭에 헌재는 다른 기관과 구성에 관해 협의할 일이 없다. 오직 재판관들이 재판소 구성권자와 결별하겠다는 의지를 굳건하게 지님으로써 헌법재판의 독립은 확보되는 것이다. 헌법재판의 독립성에 대한 반석 같은 신념을 더욱 강고하게 가져 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김이수 헌법재판관은 “회고해보면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한국사회에서 입지가 미약했던 진보정당의 운명을 결정하는 고뇌의 시간을 보냈고, 대통령 탄핵 사건의 변론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팽팽한 긴장의 시간도 있었다. 다른 사건들에서도 능력의 한계로 잠을 이루지 못한 날도 있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아직도 우리 사회는 차별과 편견, 소외로 그늘진 곳이 있다. 헌법의 따뜻한 기운이 어둡고 그늘진 곳에도 고루 퍼져나가 이 나라가 더욱 건강하게 발전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말했다.
김창종 헌법재판관은 “많은 사건 수를 보면 국민이 헌법재판을 통한 기본권 보장을 얼마나 열망하고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며 “사건 하나하나가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 없겠지만, 앞으로 날로 증가하는 사건을 어떻게 하면 선택과 집중을 통해 적정한 기간 내에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지에 관해서도 진지한 연구가 필요하다. 명백히 이유 없거나 이미 부적법 각하된 바 있는데도 반복적으로 같은 내용의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남소를 방지할 대책도 조속히 마련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창호 헌법재판관은 “우리 법문화와 사회적 담론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결정은 법질서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는 공허한 논리일 뿐이며, 사회통합에 오히려 역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헌법 현실의 고려는 개인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구실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인권이 신장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땅에서도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말하고, 자유롭게 신앙하며, 결핍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그런 곳이 되는 꿈이 있다"고 말했다.
강일원 헌법재판관은 “많은 국제행사에 참석하면서 우리나라가 우리 생각 이상으로 아시아 최고의 헌법재판소를 둔, 아시아에서 가장 발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인정받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대한민국 국민이 다른 어느 나라 국민보다 적은 기본권을 누릴 아무런 이유가 없다. 자유·평등·정의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데는 그저 우리의 의지, 그리고 공동체 의지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한편, 헌법재판관 5명이 후임 없이 한꺼번에 퇴임함에 따라 헌재는 당분간 조용호·서기석·이선애·유남석 등 4명의 헌법재판관 체제로 유지된다. 이에 따라 헌재는 재판관 5명 이상이 참여해야 하는 재판관회의도 열 수 없는 등 초유의 기능 중지 사태를 겪게 됐다.
국회는 20일 오후 2시 본회의를 열어 유남석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안과 김기영·이영진·이종석 헌법재판관 후보자 선출안을 표결한다. 이날 표결이 무산되거나 부결되면 재판관 공석 사태는 길어진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명한 이석태·이은애 헌법재판관 후보자 임명도 인사청문경과보고서 채택을 둘러싼 여야의 대립으로 지연되고 있다. 김 대법원장은 20일까지 경과보고서를 송부해줄 것을 국회에 요청해둔 상태다. 20일까지도 국회가 보고서를 송부하지 못하면 대통령이 헌법재판관을 그대로 임명할 수 있다.
여현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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