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난 내용의 현수막을 강제로 떼어내더라도 ‘정당행위’로 처벌을 면하는 경우가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사진은 기사와 무관하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법적 분쟁의 상대방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공사장 외곽 펜스에 장기간 붙어있는 현수막을 치웠다고 해서 반드시 재물손괴는 아니라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이기택 대법관)는 호텔 공사장 부지 외곽 펜스에 ㅊ씨가 사업권 양수 문제 등을 놓고 법적 분쟁 중인 호텔 사업자 ㅌ사를 비난하는 내용으로 설치한 현수막을 강제로 없앤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ㅌ사 대표 일본인 ㅅ씨의 재물손괴 사건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고 22일 밝혔다.
ㅌ사 대표인 일본인 ㅅ씨는 2015년 11월 인천 부평구에 있는 ㅌ호텔 건축부지의 외곽 펜스에 ㅊ씨가 ‘ㅌ사 회장은 손해배상 약속을 이행하라’라고 쓰인 시가 40만원 정도의 현수막 2장을 내걸자 경비원에게 현수막을 제거하도록 해 손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ㅊ씨 쪽은 ㅌ사가 자신의 호텔공사 사업권을 잃게했다며 부동산가압류 신청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벌이던 중에 ㅅ씨를 재물손괴 혐의로 고소했다.
ㅌ사와 일본인 ㅅ씨는 “호텔 공사 진행을 위해선 외곽펜스 제거가 필요해 현수막을 치워달라고 요청했지만 ㅊ씨가 불응해, 현수막을 떼어낸 뒤 그대로 보관해두고 있어 손괴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는 “가처분 등 적법한 권리구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자력구제로 현수막을 제거해야 할 정도로 긴급한 상황이었다고는 보기 어렵다”며 ㅅ씨의 정당행위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ㅅ씨에게 벌금 50만원을 선고했다.
반면에, 2심 재판부는 ㅅ씨의 행위가 재물손괴죄에 해당하지만 정당행위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애초 ㅊ씨가 현수막을 설치한 행위가 정당한 권리 행사라고 보기 힘들다. 또 현수막 제거로 피해자인 ㅊ씨에게 큰 피해가 발생한다고 보기 어려운 반면에, 현수막을 그냥 두면 사업장에 마치 심각한 분쟁이 있다는 오해를 받게되는 ㅌ사로서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한다. 가처분 결정으로 현수막을 제거하더라도 다시 현수막을 계속 설치할 수 있는 등 가처분의 실효성도 높지 않아 보인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대법원은 원심의 이런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여현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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