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형벌이 마련된다면 사형제 폐지에 동의한다는 응답이 60%가 훌쩍 넘는 국민인식조사(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대체형벌을 전제로 한 사형제 폐지 논의에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일반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사형제 폐지 관련 여론조사 결과를 10일 발표했다. 사형제를 당장 혹은 향후에 폐지하는 데에 동의하냐는 질문에는 20.3%만 찬성을 했다. 반대는 79.7%였다. 하지만 사형을 대체할 형벌 마련을 전제로 한 여론조사 결과는 크게 달랐다. 66.9%가 사형제도 폐지에 찬성했고, 반대는 그 절반 이하인 31.9% 수준이었다.
사형제도 존폐와 관련한 여론조사 결과는 강력범죄 발생에 따라 크게 흔들린다. 2003년 9월 한국갤럽의 조사 결과 사형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은 52.3%,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은 40.1%였다. 하지만 2004년 7월18일 유영철이 붙잡힌 직후 한국사회연구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사형제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66.3%, 종신형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30.9%로 나왔다. 올해에도 ‘과천 토막살인’ 등 강력범죄가 이어졌고 이른바 ‘어금니 아빠 사건’으로 불리는 이영학의 1심, 2심 재판 등이 열려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아무 전제 없이 사형제도 존폐를 묻는 질문에서 폐지에 찬성한 경우는 20.3%으로 앞선 다른 여론조사와 견줘도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대체형벌을 포함할 때 사형 폐지 의견이 60%가 넘은 것은 주목할 만 하다. 대체형벌이 마련된다면 사형제 폐지 논의에 탄력이 붙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현재 유력하게 논의되고 있는 대체형벌에는 절대적 종신형과 상대적 종신형이 있다. 절대적 종신형은 가석방 없이 평생 복역을 하는 것을 의미하며, 상대적 종신형은 일정 기간 복역 이후에 가석방할 수 있는 형벌을 의미한다. 현재 한국에는 종신형 제도는 없다. 다만 정해진 복역 기간이 없이 무기한 수감할 수 있는 무기징역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이번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 중 82.5%는 사형제의 대체형벌로 절대적 종신형과 징벌적 손해배상을 함께 적용하는 방안에 동의했다. 사망할 때까지 수감하고, 수형자가 노역의 대가로 얻는 수익의 일부를 피해자나 유족에 대한 손해배상금으로 지급하는 방안이다. 이어 78.9%는 절대적 종신형을 사형제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현행 무기징역형으로도 사형제를 대체할 수 있다는 의견은 43.9%였다. 상대적 종신형으로 사형제를 대체할 수 있다는 의견은 38%로 가장 낮았다.
사형제 유지 필요성에 관해 묻는 질문(중복응답 가능)에서는 흉악범죄 증가(23.5%), 범죄 억제(23.3%), 피해자 고통에 합당한 처벌 필요(22.7%)가 비슷한 수준으로 나왔다. 이어 대체형벌이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응답이 15.6%, 사형수는 교화와 개선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답변은 13.8%였다.
반면 사형제 폐지가 필요하다는 응답자들은 그 이유로 '오판 가능성'(22.7%·중복응답 가능)을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국가가 인간의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17.7%, 사형이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14.3%를 기록했다.
국가가 사형제도를 폐지할 경우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는 물음에는 45.5%가 받아들일 것이라고 답변했다. 간접적인 방식으로 반대 의사를 나타낼 것이라는 응답은 37%, 적극적으로 반대할 것이라는 응답은 10.5%였다. 받아들인다는 응답과 반대할 것이라는 응답의 비율은 비슷했다. 정부가 사형집행을 중단하겠다는 '모라토리엄' 선언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체의 37.5%가 동의했다.
사형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이덕인 부산과학기술대 경찰·경호계열 교수는 “이번 여론조사를 보면 적절한 대체형벌이 도입된다면 국민들도 사형제 폐지에 공감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며 “지금까지 대체형벌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관련 논의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또 “사형제 폐지와 대체형벌 도입에 있어서는 여론과 더불어 정부의 결단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사형제 폐지와 관련한 논의를 주도할 필요가 있다. 늘 법제사법위원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던 대체형벌 도입 법안이 국회 본회의 등에서 제대로 논의될 필요도 있다”라고 덧붙였다.
정환봉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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