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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풍등 날린 스리랑카인 ‘중대과실’?…법조계도 “과하다”

등록 2018-10-10 12:10수정 2018-10-10 19:56

“큰 화재 발생했다고 외국인에게 뒤집어 씌워” 청원
중실화 혐의 입증하려면 ‘화재 예견 가능성’ 입증 돼야
검찰도 “수사내용 부족” 경찰 구속영장 신청 반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 갈무리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 갈무리
지난 7일 발생한 고양 저유소 화재의 원인으로 지목된 ‘풍등’을 날린 스리랑카 노동자 ㄱ씨에 대한 선처 여론이 쏟아지고 있다. 경찰은 ㄱ씨를 지난 8일 중실화(중대한 과실로 인해 물건·건물을 태워 없앤 범죄) 혐의로 긴급체포된 데 이어 구속영장을 신청하는 등으로 강력한 처벌 의사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법조계에서조차 과하다는 지적이 많다. “‘고의’에 가까운 정도가 아니면 중실화 혐의 적용이 어렵다”는 것이다. 10일 오전 검찰도 “영장을 청구하기에 수사 내용이 부족하다”며 고양경찰서가 전날 신청한 ㄱ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반려했다.

경찰 조사 결과, ㄱ씨는 7일 오전 10시36분 고양시 덕양구 강매터널 공사장에서 전날 한 초등학교 행사에서 날아온 풍등을 주워 라이터로 불을 붙인 뒤 날려 대한송유관공사 경인지사 저유소에 대형 화재를 일으킨 중실화 혐의를 받는다. 소방 당국은 이 화재로 휘발유와 저유시설 등 43억원의 재산 피해가 났다고 밝혔다. 형법상 15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지는 실화(170조)와 달리, 중실화(171조)는 징역 3년 이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지는 중범죄다.

경찰은 화재 당시 폐회로텔레비전(CCTV)을 공개하며 ㄱ씨가 풍등에 불을 붙이는 행위의 위험성을 인지했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실제로 ㄱ씨는 자신이 날린 풍등이 저유소 쪽으로 날아가자, 풍등이 날아가는 쪽으로 급하게 달려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전날 강신걸 고양경찰서장은 “피의자가 저유소 존재를 알고 있었던 점 등을 감안, 중실화죄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과거 대법원 판례 등을 보면 ‘아주 작은 주의만 기울였더라도’ 화재 발생을 예견하여 회피할 수 있었음에도 부주의한 경우를 ‘중대한 과실’로 인정하고 있다. 대법원은 연탄아궁이 80㎝ 떨어진 곳에 스폰지요·이불솜 등을 쌓아놓아 점포를 불태워 중실화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 “화재 발생을 예견하기 어려웠다. 화재 발생에 관해 피고인에게 과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중대한 과실로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서울지역 한 판사도 “중과실은 '중대한 결과'를 가져올 것을 알았어야 성립한다. 미필적 고의까진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인식은 충분히 입증돼야 한다”며 “과연 ㄱ씨가 그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결과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까지 상황에선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과연 일반 국민 기준으로 풍등을 날린 게 국가시설 폭발로 이어졌다고 누가 예측하겠는가”라고 짚었다. 지방의 한 부장검사도 “과실은 충분히 인정되지만 중대 과실이라는 것은 인과관계에 대한 입증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며 “발생한 결과가 중대하니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고 그래서 ㄱ씨에게 엄한 책임을 물으려 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한 검찰 간부도 “중대 과실은 고의에 준해야 하는데 이번 사건이 과연 그러한지 의문이다. 어떨 땐 법률가가 아닌 일반인들의 상식이 더 법에 들어 맞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한 변호사는 “인과관계가 가장 중요한데, 풍등을 날려 불이 난 게 맞다 치더라도 현장 관리자 등 다른 과실 요소가 없었는지도 따져야 한다. 중실화의 ‘중대한 과실’은 조금만 주의했어도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 입증되야 하는데 쉽지 않고, 그렇다면 사실상 방화나 다름없는데 이 사안을 그렇게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실제 대법원은 1994년 전기석유난로를 켠 채 퇴근한 뒤 사무실에 불이난 사건에서 “난로 자체에 고장이 있었다거나 가연물이 어떠한 경위로 온풍구에 직접 접촉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 한 난로의 과열이 화재발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쉽사리 인정할 수 없다”며 중실화 혐의에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기도 했다.

9일 오전 경기 고양경찰서에서 경찰 관계자가 고양 저유소 화재사건과 관련된 풍등과 동일한 제품을 공개하며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전날 경찰은 고양 저유소 화재사건과 관련해 중실화 혐의로 스리랑카인 A(27)씨를 긴급체포해 조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9일 오전 경기 고양경찰서에서 경찰 관계자가 고양 저유소 화재사건과 관련된 풍등과 동일한 제품을 공개하며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전날 경찰은 고양 저유소 화재사건과 관련해 중실화 혐의로 스리랑카인 A(27)씨를 긴급체포해 조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ㄱ씨 긴급체포 후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ㄱ씨에 대한 처분을 안타까워하면서 대한송유관공사의 관리 책임을 묻는 글들이 줄을 이었다. 실제로 풍등이 송유관공사 앞마당에 떨어져 불씨가 잔디밭으로 옮겨붙는 오전 10시36분부터 폭발이 난 10시54분까지 18분 동안 저유소 상황실에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실이 드러났다.

한 청원자는 “고양 저유소 화재 사건은 개인의 책임이 아닌 시스템의 문제로 발생한 것”이라며 “300원짜리 풍등 하나에 저유소가 폭발했다면, 안전관리 책임자의 과실이 더 크다. 돈 벌고 일하기 위해 들어온 평범한 우리 이웃 노동자에게 모든 잘못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청원자도 이렇게 썼다. “풍등을 날렸다는 스리랑카인을 본 적도 알지도 못하지만 불을 내려는 고의성도 없었고 풍등으로 불이 날 수도 있다는 예측 가능성도 없었다. 단지 큰 화재가 발생한 것에 대해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기 위해 다른 여러 가지 원인은 제쳐 두고 연고도 힘도 없는 외국인에게 모두 뒤집어씌우고 구속까지 한 것은 너무 비열하고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럽습니다”

김양진 김민경 현소은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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