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동구 성수동 제화거리 노동자들이 9일 오후 공장에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한겨레>가 서울 종로구 ‘귀금속 거리’, 창신동 ‘봉제 거리’에 이어 찾은 성수동 ‘제화 거리’는 한국 수제화의 ‘메카’로 자리 잡아온 곳이다. 성수동 노동자들은 초저가 공임과 열악한 처우를 감내하며 ‘명품 수제화’를 만들어왔다. 이들은 올해 들어 ‘4대보험 가입’ ‘퇴직금 지급’ ‘공임 인상’ 등을 요구하며 30년간 이어온 침묵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20여명의 제화공이 동대문시장에 납품할 수제화를 만드는 성수동의 한 소규모 제화공장. 들어서면 가죽과 부자재를 덧붙일 때 쓰는 본드 냄새가 불쑥 코를 찌르고, ‘두두두’ 가죽을 두들기는 망치 소리와 ‘딱딱’ 구두 핀을 박는 소리가 귀를 때린다. 지난 9일 오전, 1968년부터 수제화를 만들었다는 제화공 김아무개(68)씨가 구두집게로 가죽 밑창을 잡아 뜯고 있었다. 50년 전 퇴계로에서 일을 시작해 1990년대 초반 성수동으로 옮긴 김씨의 오른손 검지 마디에는 커다란 혹이 붙어 있었다. “집게로 가죽, 밑창과 씨름하다 생긴 영광의 흔적이지.” 능숙하게 구두 밑창을 훑는 김씨의 손은 구두집게와 망치를 놓은 뒤에도 공구를 쥔 모양으로 곱아 있었다.
지난 5월11일, 김씨와 같은 성수동 제화공 500명이 성수역 2번 출구 앞에 모였다. 이들은 구두집게와 망치 대신 “탠디 투쟁 승리했다, 이제는 성수동이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었다. “원래 제화공은 구두만 알지 다른 건 몰라요. 제가 노조 하면서 들은 조롱이 얼마인데요.” 정기만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장이 말했다. 수제화공장 400여곳과 제화공 2800여명이 모인 ‘수제화의 메카’ 서울 성동구 성수동 수제화거리에서 “30년 역사에 없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
■ 27만5천원에 팔리는 구두, 제화공 손에는 ‘7천원’
코오롱에프엔시(FnC)의 구두브랜드 ‘슈콤마보니’의 하청업체에서 근무하는 40년 경력의 제화공 최경진(56)씨는 부인과 함께 2인1조로 ‘갑피’ 공정을 한다. 구두를 만드는 공정은 크게 ‘갑피’와 ‘저부’로 나뉜다. 신발의 상부를 뜻하는 ‘갑피’는 바닥창을 제외한 가죽을 디자인에 맞춰 재단해 이어 붙이는 공정이고, ‘저부’는 갑피에 바닥창을 붙이고 밑창·굽·깔창 등을 달아 구두를 완성하는 작업이다.
최씨가 수제화 한 켤레당 받는 돈(공임)은 최근까지 7천원이었다. 제화공들은 따로 ‘월급’을 받지 않고 수제화 개수마다 일정한 ‘공임’을 받는다. 그나마 최씨는 대기업 계열사의 하청업체에서 일해 공임이 높은 편이다. 성수동 제화공들은 평균 5500원 정도의 공임을 받는다. “2000년대 초반에도 공임이 4천~5천원 정도였으니 오른 것도 아니에요. 물가 생각하면 오히려 공임이 계속 떨어지기만 한 거죠.”
최씨는 아침 8시에 출근해 밤 11시 반까지 14~15시간을 일한다. 점심·저녁을 각각 15분 만에 해결할 때 빼고 제대로 쉬지도 않는다. 2인1조로 그렇게 일해서 만든 구두가 하루에 22~23켤레다. 공임이 7천원이니 한 사람당 8만원꼴이다. 그렇게 한달에 22~23일을 일해 530여켤레를 만들면 수중에 380만~400여만원이 들어온다. 부인과 나눠 계산하면 한 사람에 200만원도 되지 않는다. 이 200만원이 채 안 되는 돈이 40년 동안 구두를 만든 ‘장인’이 하루 14~15시간을 일해서 손에 쥘 수 있는 돈이다.
최씨가 공임 7천원을 받아 만든 수제화는 백화점에 입점하는 순간 최소한 27만5천원짜리 여성구두가 된다. 백화점의 ‘자릿세’와 원청 ‘브랜드’의 마법이다. 구두값 27만5천원 중 백화점이 수수료로 10만원가량을 가져가고, 원청인 대기업 계열사가 다시 12만~13만원 정도를 가져간다. 나머지 5만~6만원 가운데 재료비, 임대료, 관리직 임금 등을 빼고 저부·갑피 제화공에게 떨어지는 돈이 각각 7천원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예술의 영역’이라고 자부하는 최씨는 ‘공임’을 생각하면 “무력감과 자괴감”을 느낀다고 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 제화 노동자들이 9일 오후 작업 도중 주름지고 굳어진 손을 보여주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 성수동은 어떻게 ‘수제화의 메카’가 되었나
서울 영등포에서 살았던 정용일(54)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4살 때 구두 일을 시작했다. 생계가 막막하던 참에 동네 제화공 형님의 권유로 시작한 일이었다. “80년대 중반에는 일감도 많고 처우도 좋았죠. 80년대 중반 당시에 제화공들은 한달에 120만~130만원은 벌었어요. 공무원 월급이 30만원인 때였어요.” 정씨는 “당시만 해도 정말 구두 일이 돈이 되던 시절”이라고 말했다.
40년 제화공 손엔 커다란 혹
아내와 하루 14~15시간 일
1인당 한달 200만원도 못 벌어
시중 구두값 35~40%는 백화점에
원청 대기업에 45%가 돌아가
2000년대 초 소사장제 ‘억지 수용’
원청서 여전히 모든 지시 받는데도
4대보험·퇴직금·연월차도 없어
수제화 장인들 30년만에 침묵 깨고
노동조건 개선요구 집회·농성 나서
“이젠 제화공들 거의 50대 넘어
처우 이런데 젊은이들이 배우겠나
구두장이가 대우받아야 제화 살죠”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 중반을 회상할 때 제화공들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남기범 서울시립대 교수(도시사회학) 등이 2016년에 발표한 ‘성수동 수제화산업의 지역산업생태계의 구조와 발전방향’을 보면, 공장과 매장이 나란히 붙은 공방에서 소비자에게 직접 팔던 고급 ‘명동 살롱화’가 한국 수제화산업의 시초였다. 명동의 고급 ‘살롱화’는 1970년대 경제성장에 올라탄 중상류층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금의 성수동 제화공은 대부분 70년대 후반 명동 살롱화로 구두일에 입문했다. 이들은 명동, 염천교, 성동구 금호동 등에 흩어져 있었다.
80년대 후반이 되면서 한국 수제화산업의 중심축이 명동과 염천교 등지에서 성수동으로 이동하게 된다. 폭증한 소비 시장에 걸맞게 생산량을 늘려야 했던 수제화 공장들은 임대료가 높은 명동에서 제조업 인프라가 비교적 잘 갖춰져 있고 땅값도 쌌던 성수동으로 터를 옮겼다. 90년대 초, 성수동은 점차 가죽과 장식 등 부자재부터 완성된 수제화까지 제화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을 수 있는 ‘수제화의 메카’가 됐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 제화거리 노동자들이 9일 오후 공장에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 제화공 절반이 ‘사장’, 4대보험·퇴직금 앗아간 ‘3.3%’
하지만 호시절은 길지 않았다. 1997년 외환위기와 저렴한 중국산 구두의 등장이 변곡점이었다. 불황으로 위축된 국내 수제화산업은 값싼 중국산 구두의 등장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는다. 성수동에 직접 공장을 세워두고 수제화를 생산하던 유명 브랜드는 하청업체에 구두 생산을 맡기기 시작했고, 이들 하청업체는 2000년대 초반부터 제화공에게 ‘소사장’, 즉 개인사업자가 되어달라고 회유,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4대보험이나 퇴직금 없이 저가 공임에 시달리는 ‘소사장’ 제화공들은 이 시기에 탄생했다.
“3.3%가 문제야. 구두쟁이들이 뭔지도 모르고 냈던 ‘3.3%’.” 39년 경력의 박아무개(54)씨는 대뜸 ‘3.3%’를 말했다. “2000년쯤부터 하청업체 사장들이 울며불며, 어떤 사장은 협박조로 제화공들에게 주민등록등본을 요구했어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등본을 준 사람들 월급명세서에서 어느 날부터 세금 3.3%가 까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박씨가 허탈하게 웃었다. “‘사장님’으로 승진해서 낸 돈이더라고.”
소상공인연구원의 ‘성수동 수제화사업체 실태조사 용역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4월 기준으로 수제화사업체 493곳이 있는 서울 성수동 ‘제화거리’에는 ‘작은 사장’(소사장) 1214명이 있다. 성수동 제화사업체에서 일을 하는 제화공 2811명의 절반 정도가 ‘사장’인 것이다. 박씨가 말하는 ‘3.3%’는 성수동 제화공들이 임금노동자가 아닌 자영업자인 ‘소사장’으로 낸 사업소득세의 세율이었다.
얼떨결에 ‘소사장’이 된 대가는 ‘3.3%’만이 아니다. 1214명의 성수동 제화공은 원청으로부터 물량과 디자인, 세세한 재료까지 상시적인 업무지시를 받지만, ‘사장’인 탓에 4대보험에 가입하거나 퇴직금을 받을 수 없었다. 당연히 임금 인상을 위한 교섭도 할 수 없었고, 월차와 연차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 “공임부터 물량까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가죽에서부터 하다못해 실까지 모든 것이 다 지시가 내려오니까요. 내가 만들어서 내가 납품을 해야 사장인데, 명목만 ‘사장’으로 해놓고 세금·보험 부담은 떠넘긴 거예요.”
서울 성동구 성수동 제화거리 노동자들이 9일 오후 공장에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작업대 다리에 붙어있는 가죽 접착제가 열악한 노동환경을 말해주고 있다.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 “구두쟁이가 살아야 성수동 제화거리가 삽니다”
“탠디 바람이 성수동에 불기 시작했습니다.” 유명 수제화 브랜드 ‘탠디’의 하청업체에서 일했던 32년 경력의 제화공 박완규(50)씨가 말했다. 박씨는 지난 4월 서울 관악구 ‘탠디’ 본사에서 16일간 농성을 벌인 끝에 8년간 동결되었던 공임 인상을 얻어낸 60여명의 제화공 중 한 사람이다. 적게는 30년, 길게는 50년에 가까운 경력에도 장인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던 ‘구두쟁이’들이다. 탠디 합의 직후 이어진 성수동 제화공들의 시위는 ‘구두쟁이’들의 이 오랜 침묵에 처음으로 난 균열이다.
‘작지만 값진 승리’들이 이어졌다. 탠디가 공임 인상을 약속한 뒤, 구두업체 ‘고세’도 공임 1500원 인상과 퇴직연금을 약속했고, ‘라팡제화’는 저부 1300원, 갑피 1500원의 공임을 인상하기로 약속했다. 지난 9월에는 ‘코오롱에프엔시’도 공임 1500원 인상에 합의했다. 특히 구두 제조업체 ‘세라’는 5500원 수준의 공임을 1400원씩 인상하고, 원청과 계약한 제화공의 4대보험과 퇴직금까지 보장해주기로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올해 초 20여명에 불과했던 제화지부 조합원은, ‘탠디 투쟁’ 직후에는 120명, 성수동으로 전선이 확대된 뒤에는 700여명까지 늘어났다.
이들은 어렵게 낸 작은 균열 사이로 햇살이 비치고 바람이 불어오길 기대한다. 공임은 여전히 적고, 장시간 노동은 계속되고 있으며, ‘소사장제’의 굴레는 ‘추후 협의대상’으로 밀쳐놨을 뿐이다. 합의된 내용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공임 인상에 합의한 ‘세라’의 하청업체 한곳은 “노조를 탈퇴하면 한달에 30만원을 주겠다. 공임 인상은 못 하겠다”고 버티며 제화공들을 회유하다 지난 7월 말 폐업해버렸다.
하지만 침묵을 깬 제화공들은 멈출 생각이 없다. 이들에게는 성수동 제화거리의 미래가 달린 일이다. “지금 성수동 제화공들은 거의 90%가 50대가 넘었어요. 제화 아카데미를 운영해서 청년들에게 제화 일을 가르쳐봤지만 성수동에 흡수가 안 돼요. 처우가 이렇게 엉망인데 어떤 청년이 여기서 일하려고 하겠어요.” 정기만 제화노조 지부장은 ‘30∼50년 경력의 성수동 장인들이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백화점과 원청이 아닙니다. 구두쟁이가 살아야 성수동 제화거리도 삽니다. 지금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