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은 채권이 차일피일 빚을 갚지 않은 채무자 때문에 시효 10년을 넘겨 소멸되는 것을 막으려면 그동안에는 시효 소멸 전에 채권이 있는지부터 다시 따지는 ‘이행소송’을 내야 했다. 앞으로는 이전 판결로 확정된 채권의 시효를 중단시키기 위한 ‘재판상의 청구’가 있다는 점에 관해서만 확인해달라는 새롭고 간편한 방식의 ‘확인소송’도 허용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는 18일 원아무개씨가 남아무개씨를 상대로 낸 ‘소멸시효 연장을 위한 대여금 반환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승소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원씨는 남씨를 상대로 빚 1억6000만원과 지연손해금을 갚으라며 소송을 내어 2004년 12월 원고 전부승소 판결을 확정받았다. 하지만 그 뒤에도 남씨는 돈을 갚지 않았고, 2013년에는 파산선고로 면책 결정을 받았다. 원씨는 10년의 채권 소멸시효를 앞둔 2014년 11월 시효중단을 위해 다시 소송을 냈다.
1심에서는 피고 남씨가 답변서를 내지 않아 변론 없이 원고 원씨가 승소했다. 2심에서 남씨는 “파산 절차에서 면책 결정이 확정됐으므로 원씨의 채권에 대해서도 면책됐다”고 주장했다. 2심 재판부는 “원씨가 판결로 확보한 채권의 존재를 남씨가 알면서도 일부러 채권자 목록에 기재하지 않은 셈이어서 원씨 채권에 대해서는 면책 결정에도 불구하고 남씨의 책임이 면제되지 않는다”며 1심과 같이 원고 남씨의 전부 승소로 판결했다.
대법원도 하급심의 판단이 옳다고 봤다. 다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원씨가 다시 낸 소송이 채권이 있는지부터 다시 따져야 하는 ‘이행소송’이어서 간편한 방식의 새로운 ‘확인소송’도 허용할 것인지를 상고이유와 무관하게 직권으로 심리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7대6의 의견으로 ‘새로운 방식의 확인소송’도 허용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앞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7월 “이전 소송(전소)에서 승소 확정판결을 받으면 나중에 같은 내용의 뒷쪽 소송(후소)을 같은 상대방을 상대로 다시 내는 것은 부적법하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확정판결에 의한 채권의 소멸시효 10년이 임박한 경우에는 시효중단을 위해 이전 소송과 같은 이행소송을 뒷쪽 소송으로 낼 수 있다”고 판결한 바 있다. 이번 판결은 지난 7월 허용한 ‘이행소송’ 외에 시효중단을 위한 새로운 방식의 ‘확인소송’도 허용한 것이다.
다수의견을 낸 김명수 대법원장 등 대법관 7명은 “후소(뒷쪽 소송)로 ‘이행소송’이 제기되면 채권자는 시효중단만 원할 뿐인데도 청구권이 실제로 있는지,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지를 새로 심리하고 판단해야 해 사법 자원이 낭비된다. 후소의 적법 여부를 좌우하는 기준도 모호하고, 후소 판결에 따라서는 채권의 이중 집행의 위험도 있다”며 “이행소송의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의 확인소송’을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대법원이 제시한 ‘새로운 방식의 확인소송’은 실체적 법률관계에 관한 심리 없이, 채권자가 전소(이전 소송)의 판결이 확정됐다는 점과 그 판결에 따른 청구권의 시효중단을 위해 후소(뒷쪽 소송)가 제기됐다는 점만 주장하면 법원이 이 문제만 심리하는 방식이다. 채무자 역시 새로운 이의 사유가 있어도 이를 주장할 필요가 없고, 법원도 채무자의 이런 주장을 심리할 필요가 없다. 채권자는 소멸시효 기간 10년이 임박하지 않아도 확인소송을 낼 수 있다. 또 채권자는 이행소송과 확인소송 중 자신에게 적합한 것을 선택해 낼 수 있다.
반면에, 권순일·박정화·김선수·이동원·노정희 대법관은 "구체적인 권리의무에 관한 분쟁이 아니라 ‘시효중단을 위한 재판상 청구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 소송이라 보기 어렵고, 확인소송으로 '확인의 이익'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행소송을 허용하는 지금 실무에 문제가 많다고 보이지 않고, 확인소송 허용으로 편리함보다는 혼란만 가중될 우려가 있다"며 ‘새로운 방식의 확인소송’은 허용할 수 없다는 반대의견을 냈다.
김재형 대법관도 "새로운 방식의 확인소송은 입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행소송 이에 다른 소송을 허용하려면 전소의 판결로 확정된 채권 그 자체를 확인대상으로 삼는 '청구권 확인소송'이 옳다"고 반대했다.
여현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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