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 때 법원행정처가 “진보세력의 대법원 입성 위험”이라며 반대했던 ‘대법관 증원’에 판사 상당수가 찬성 의사를 나타냈다. 반면 양승태 대법원장 최대 역점 사업으로 꼽히며 사법농단 사태로 이어졌던 상고법원 설립은 판사 10명 중 8명이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5일 전국법관대표회의(의장 최기상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상고심 개편방안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전국 판사 3000여명 중 3분의 1가량인 898명이 참여한 설문조사에서 절대다수인 97.2%(866명)가 상고심 개편에 동의했다. 대법원에 접수되는 사건의 증가로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한 대법관 13명의 업무부담이 지나치게 커졌고, 그 결과 재판받는 국민이 피해를 본다는 이른바 ‘대법원 10초 재판’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상고심 개선 방안으로는 △상고허가제(74.4%, 664명) △대법관 증원(54%, 481명) △상고법원 도입(20.7%, 184명)을 꼽았다. 상고허가제는 무분별한 상고를 막기 위해 대법원이 항소심 재판기록 등을 보고 상고할 사건과 그렇지 않은 사건을 결정하는 제도다. ‘무조건 세 번’ 재판받기를 원하는 여론의 반대가 심하다는 단점이 있다. 1981년 실시됐으나 국민의 재판 받을 기회를 제한한다는 지적 속에 1990년 폐지됐다. 이 때문에 실현 가능성을 낮게 보는 판사들도 많았다. 상고허가제 방안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한 판사들은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지 못한다” “국민과 유관기관의 심한 반대로 실현 가능성이 없다” 등을 반대 이유로 꼽았다.
대법관 증원 찬성(54%) 비율은 법원이 그동안 대법관증원에 반대했던 기조가 강했던 것에 비춰 높은 수치다. 찬성한 판사들은 그 방안으로 ‘대법관 6명 증원’(32%, 166명)을 가장 많이 택했다. 대법관 수가 늘어날 경우 전원합의체 합의가 어렵다는 지적에 대해선 ‘전문재판부를 편성해 전문영역별 전원합의체를 구성’하자는 의견(62.5%, 323명)이 많았다. 대법관증원 방안은 법원 밖에서 지지가 많다. 반면 대법관을 일부 증원하더라도 대법원 업무부담이 크게 줄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최고법관 자리를 늘리는 것에 대한 일반 국민의 부정적 여론도 만만치 않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야심 차게 추진하다 재판개입으로 이어진 상고법원 도입은 가장 낮은 지지(20.7%)를 얻는 데 그쳤다. 상고법원은 대법원 밑에 따로 ‘상고법원 판사’를 두고 대법원으로 올라오는 사건 중 비교적 간단한 사건을 맡기는 제도다. 판사들은 상고법원을 반대하는 이유로는 “사실상 4심제로 흐를 우려가 있다”를 가장 많이 꼽았다. 상고법원 판사가 되기 위해 대법원장 ‘눈치’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법 관료주의를 심화시킬 소지가 있다”는 의견도 많았다. 양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을 추진했던 당시 법원 안팎의 반대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 판사는 “상고법원 설립은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판사들이 선호하는 상고허가제는 국민 반대가 크다. 상고심 개선은 필요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방안인 대법관 증원에 찬성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김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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