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2012년 12월20일 서울고법에서 열린 2심 재판에서 징역 4년6개월과 벌금 10억원을 선고받고 침대에 누운 채로 구급차에 오르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2011년 1월 1400억원 규모의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됐다가 2012년 6월 항소심 진행 중 보석으로 풀려난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대법원의 유죄 판단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구속과 수감을 모면했다. 이 전 회장은 구속 뒤 8년 가까이 재판을 받아오는 동안 병원 입원과 보석 등을 거듭해, 실제 구치소에 수감된 기간은 63일에 불과하다.
서울서부지법→서울고법→대법원→서울고법→대법원까지 5번 재판을 받는 동안 이 전 회장이 선임한 변호사는 전직 대법관 2명을 비롯해 113명(중복선임 제외 77명)에 달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법원과 검찰 출신 전관 변호사다. 앞으로 서울고법을 거쳐 대법원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계속 보석 상태로 재판을 받게 되는 탓에 보석을 취소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대법원 3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25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경법)상 횡령 혐의로 기소된 이 전 회장의 재상고심에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한 환송 후 원심 판결을 기각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이 전 회장이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에서 규정한 금융회사의 최대주주 중 최다출자자 1인에 해당한다면 이 전 회장의 조세포탈 관련죄는 다른 죄와 분리해서 심리·선고해야 하는데 환송 후 원심이 이를 심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2심 재판을 다시 하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다만 함께 기소된 태광산업㈜에 대해서는 벌금 3억원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이 심리 절차상의 흠결을 문제 삼아 이 전 회장에 대한 2심 재판을 세번째로 다시 하라고 판결함에 따라, 이 전 회장은 검찰과 법원이 보석 취소 절차를 밟지 않는 한 여전히 불구속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됐다. 그러나 이 전 회장이 간암과 대동맥류 질환으로 거동이 불가능하다는 2012년 당시의 보석 사유와 달리, 최근 집 밖에서 술을 먹는 모습이 여러 차례 목격되는 등 정상인과 크게 다름없이 행동한다는 <한국방송>(KBS) 보도도 있어 ‘황제 보석’ ‘재벌 특혜’ 등의 논란이 예상된다.
이 전 회장은 세금계산서를 발행하지 않는 ’무자료 거래’와 허위 회계처리 등을 통해 회삿돈 500억여원을 횡령하고 주식 등을 싼 가격에 사들여 회사에 900억여원의 손해를 입힌 혐의로 2011년 1월 구속기소됐다. 법인세와 부가가치세 9억3000여만원을 포탈한 혐의도 받았다.
1심 재판부는 공소사실 대부분을 유죄로 인정해 이 전 회장에게 징역 4년6개월에 벌금 20억원을 선고했다. 2심도 일부 혐의만 무죄로 판단하고 대부분 유죄를 인정해 징역 4년6개월을 선고하면서 벌금만 10억원으로 줄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6년 8월 횡령 대상은 ‘섬유제품’이 아닌 ‘판매대금’이 되어야 하므로 횡령액을 다시 산정해야 한다며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당시 대법원은 원심처럼 이 전 회장이 섬유제품을 횡령했다면 이를 판매한 것은 이 전 회장의 개인적 거래가 돼, 태광산업이 부가가치세를 납부할 의무가 없어지는 모순에 빠진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 전 회장이 섬유제품의 판매대금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횡령하려는 목적으로 무자료 거래를 했다고 보면 태광산업에 조세포탈 혐의 적용이 가능해진다고 밝혔다. 당시 상고심에는 김능환 전 대법관 등 변호인 15명이 참여했다.
이어, 환송 후 다시 열린 2심 재판에서는 대법원의 파기환송 판결 취지대로 공소장 변경이 이뤄졌다. 환송 후 2심 재판부는 "횡령 금액 205억원 중 이 전 회장이 관련된 것은 195여억원으로 인정된다"며 대법원 취지대로 횡령액을 다시 산정해 징역 3년6개월에 벌금 6억원으로 감형했다. 2004년도 법인세 포탈 혐의도 포탈액 9억3000여만원 중 공제받을 수 있었던 액수를 제외한 5억6440만원만 유죄로 봤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날 재상고심에서 2016년 판결 때에는 지적하지도 않았던 새로운 이유로 환송 후 원심판결을 다시 파기했다.
대법원은 이 전 회장 변호인단이 제출한 변론요지서 등을 근거로 들어, “이 전 회장의 공소사실 가운데 조세범 처벌법 위반죄는 금융사지배구조법에 규정한 죄에 해당한다. 변론요지서 등에 의하면 이 전 회장은 금융사지배구조법에서 규정하는 몇몇 금융회사의 ‘최대주주 중 최다출자자 1인’(적격성 심사대상)으로 볼 여지가 있다. 원심은 이 전 회장이 적격성 심사대상인지를 직권으로라도 확인했어야 했다. 적격성 심사대상이면 금융사지배구조법의 명문 규정에 따라 경합 관계에 있는 다른 죄와 분리해서 심리·선고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원심은 이를 따로 심리하지 않고 경합범이라는 이유로 이 전 회장에게 하나의 형을 선고한 위법을 저질렀다”고 파기 이유를 밝혔다. 안대희 전 대법관, 김상준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 변호인단(10명)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금융사지배구조법 제32조 제6항은 적격심사대상이 조세범 처벌법 등을 위반하면 반드시 다른 죄와 분리해서 심리하고 선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편, 채이배 바른미래당 의원은 이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이 전 회장이 과거 보석 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거짓 서류'를 제출했다는 제보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채 의원은 “검찰이 이처럼 '법원을 기망한 행위'를 직접 수사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문무일 검찰총장은 "거짓 서류를 제출했다면 그 부분은 수사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답했다.
여현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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