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대법원 법원 전시관 안에 법관의 양심과 독립 등을 명시한 헌법 제103조가 적혀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14년 12월19일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하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정당법에 따라 가압류·가처분신청을 통한 통진당 재산 국고 환수 조처에 들어갔다. 당시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은 해산 당일과 이틀 뒤인 12월21일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 등에게 통진당이 남은 재산을 숨겼을 가능성을 거론하며 ‘재산 은닉 엄단’을 주문했다고 한다. 김 수석은 이를 김종필 청와대 법무비서관에 전하며 “가압류나 가처분 중 어떤 걸 하는 게 좋은지 법원 협조를 구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김 비서관은 곧바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당시 행정처 기획조정실장)에게 연락했고, 대법원 재판연구관실과 행정처 사법지원실 등은 관련 검토에 들어갔다.
25일 <한겨레> 취재 결과, 당시 재판연구관실과 사법지원실은 “가압류와 가처분 모두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가압류보다는 가처분이 낫다”는 의견을 냈다. 정당법에 따라 해산이 결정된 정당의 잔여재산은 자동으로 국고로 귀속된다. 이미 정부 소유 재산인데 채권보전을 위한 가압류가 아닌 소유권 보전을 위한 가처분 신청을 내는 게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임 전 차장은 이 의견을 곧바로 김 비서관에게 전달했다. 사법농단을 수사하는 검찰은 당시 청와대 회의 문건, 고 김영한 민정수석의 업무수첩, 김종필 전 비서관과 행정처 심의관 진술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당시 행정처는 중앙선관위원장을 겸하는 이인복 대법관에게 선관위 쪽 업무담당자를 파악했고, 12월23일께 사법지원실 관계자가 선관위에 연락해 “가압류가 아닌 가처분으로 가는 게 맞다”고 일러줬다고 한다. 사법지원실의 또 다른 심의관의 경우 이미 가압류로 접수된 전국 재판부에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가처분으로 결정하는 게 맞다”고 주문했다고 한다.
실제 법원은 중앙선관위와 서울시 선관위 등이 채권 가압류를 신청하자 ‘해산 정당의 잔여재산을 국고로 귀속시키려면 가압류가 아닌 가처분을 신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취지의 보정명령을 내렸다. 이에 선관위는 법원 주문에 따라 가압류 대신 가처분 신청을 냈다. 이를 비롯해 전국 법원 18개 재판부에서 가처분 신청이 줄줄이 인용됐다. 이 사건을 심리한 판사들은 최근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쪽에 (가압류가 아닌 가처분) 청구권이 있는지 법리적으로 의문이 들었지만 행정처 지침에 따랐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행정처는 가처분 인용 결정이 늦어지는 재판부에는 ‘왜 결정이 늦어지냐’며 독촉하기도 했다고 한다.
검찰은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이 상고법원 입법에 사활을 걸던 상황에서, 청와대가 원하던 통진당 해산 결정을 한 헌법재판소와의 위상 경쟁을 의식해 행정처가 법리 검토 등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임 전 차장은 최근 검찰 조사에서 “청와대로부터 이런 문의를 받았고, 실제 검토 결과를 알려준 것도 맞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사법지원실에서 검토했다면 (내가) 지시를 한 것 같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검찰은 이에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임 전 차장의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은 26일 오전에 열린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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