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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90살 제주 4·3 생존자의 법정진술 자체가 치유 과정이죠”

등록 2018-10-28 14:50수정 2018-10-28 20:40

‘제주 4·3 수형인 재심’ 끌어낸 임재성 변호사
재판기록 없어 재심 아닌 국가배상 고려했지만
“죽기 전 누명 벗겨달라”는 호소에 재심 청구
법정에 나온 80~90대 고령의 생존자들
떨면서도 불법구금·고문 사실 일관되게 진술
“이미 숨진 수형인 2500여명도 입법으로 구제해야”
제주 4·3 수형인 재심을 이끌어 낸 임재성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가 23일 저녁 서울 서초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제주 4·3 수형인 재심을 이끌어 낸 임재성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가 23일 저녁 서울 서초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재심 대상 판결들에 대하여 각 재심을 개시한다.’

지난달 3일 제주 4·3 당시 수형인 18명의 재심개시 결정문을 받아든 임재성(38·변호사시험 4회) 변호사는 “죽기 전에 제대로 된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던 당사자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 안도했다. 이들은 1948년 12월과 이듬해 7월 군사재판(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전국 형무소에 수감된 2530명 중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들이다. 무죄를 호소했지만 판결문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임 변호사는 같은 법무법인의 김세은 변호사와 함께 재심개시 결정을 끌어냈고, 29일 첫 재심 공판을 앞두고 있다.

지난 23일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해마루에서 만난 임 변호사는 처음부터 재심을 1순위로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2015년 말 같은 사무실에 있던 장완익 변호사의 제안을 받고 법률 검토 끝에 내린 결론은 국가배상소송이었습니다. 재판 관련 기록이 수형인 명부 외에는 없었어요. 인혁당 재심도 기록이 없어 재판이 오래 걸렸는데 당사자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재심은 어렵다고 봤습니다.”

임 변호사의 마음을 돌린 건 수형인들과 이들을 돕는 ‘제주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의 의지였다. 2016년 장 변호사와 제주도를 찾았던 임 변호사는 “돈이 아니라 명예회복이 중요한데 배상청구를 하는 순간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도민연대의 반대에 부딪혔다. 80~90대 고령의 수형인들도 “죽기 전에 누명을 벗겨 달라”며 재심을 원했다. “한국사회에서 재심은 과거 부당한 공권력의 피해자들이 권리를 회복하는 대표적 절차로 자리 잡았습니다. 당사자들이 원하는 데다, 국가배상소송 역시 결국은 당시 재판의 적법성을 다퉈야 하는 어려움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재심을 청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임 변호사 등은 지난해 4월 수형인 18명의 재심 청구서를 제주지법에 냈다.

재심개시 결정 여부를 결정하는 첫 심문기일은 지난 2월에야 잡혔다. 심문이 시작되자 변호사들은 가장 큰 장애물인 ‘기록 부재’를 절감해야 했다. 법무부, 경찰청, 국방부, 국가기록원 등 가능한 모든 국가기관에 관련 자료를 요구했다. “당시 재판이 얼마나 부실하게 진행됐는지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기록 부재’를 법원이 확인하는 것도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성과도 있었다. 재판 시작 전까지 유일한 기록이었던 2530명의 이름, 형량, 형무소 등이 적힌 수형인 명부 외에도 4·3 당시 제주에 주둔하던 제2연대 연대장이 형무소장에게 형 집행을 요청한 군 집행지휘서, “군법회의가 이루어졌다”는 당시 육군본부 기록심사과장의 진술을 확보했다. 법원은 재심개시를 결정하며 수형인 명부와 새롭게 발견된 두 자료를 수형인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근거로 인정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섯 차례 열린 심문절차에서 가장 강력한 ‘진실’은 살아있는 증거인 수형 당사자들이었다. 요양원에 있는 정기성씨를 제외한 수형인 17명은 모두 법정에 서서 당시의 불법구금과 고문을 증언했다. “법정에서 떠시는 모습을 보면서, 젊은 사람들도 긴장하고 힘들어하는 곳에 80~90살 넘은 분들을 세워 심문하는 게 가혹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얼마나 억울하고 고생했는지 자기 목소리로 말하고, 그 말로써 재심개시를 끌어낸 과정이 하나의 치유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세요?” 임 변호사와 김 변호사는 17명의 심문이 끝날 때마다 이렇게 물었다. 심문은 고문과 불법구금 같은 재심개시 사유가 있는지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변호사들은 당사자들의 나이와 사건의 무게를 고려했을 때 조금 더 많은 목소리가 기록되기를 바랐다. 70년 전 법정에서는 고개조차 들지 못했던 수형인의 “정말 억울하다”는 한탄부터 “지금이라도 바로잡아 달라”는 호소는 재판부에도 가 닿았다. 제주지법 형사2부(재판장 제갈창)는 재심개시 결정문에서 “재심청구인들이 법정에서 진술에 임하는 모습, 태도, 진술의 뉘앙스 등은 꾸미거나 과장한다는 느낌이 없이 진솔하고 자연스럽다. 당시 자신들이 겪은 일들에 관한 진술은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김경인·김순화·김평국·박내은·박동수·박순석·부원휴·양일화·양근방·오계춘·오영종·오희춘·임창의·정기성·조병태·한신화·현우룡·현창용. 이들의 재심개시 결정으로 4·3 수형인 명예회복은 시작됐다. 변호사들은 10여명 남은 생존자들뿐 아니라 숨진 수형인들의 재심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숨진 이들은 법정에 나와 증언할 수 없고 진술 기록도 없어 첫 재심개시 결정보다 어렵다. 그래서 임 변호사는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수형인 2530명이 비슷하게 고문, 불법구금을 당했을 텐데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위법한 판결을 방치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법원이 재심개시 사유가 있다고 본 만큼 이제는 입법으로, 차별 없이 수형인들을 모두 구제해야 해야 할 필요와 당위성이 더 커졌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옥살이를 한 임 변호사는 대학원에서 평화를 주제로 연구를 하다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했다. ‘폭력’에 관심이 있는 그는 변호사로서 4·3 수형인 재심뿐 아니라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시민평화 법정,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등에 관여했다. “내가, 우리가 폭력을 당했다는 공포와 적대감에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행한 폭력을 기억하고 성찰할 때만이 그 폭력을 반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위해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야말로 4·3과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 안전판이 있는 사회입니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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