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회의실 들머리에 법과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어'가 붙어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지난 8월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받았더라도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관련 재판에서 헌재 결정에도 손해배상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정부 주장은 힘을 잃을 전망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48부(재판장 오상용)는 15일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민주청년학생 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1심에서 사형 등을 선고받은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 등 11명과 그 가족들이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대한민국은 95억여원과 그 이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민청학련 사건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를 공고화한 유신헌법 체제 유지를 위해 고문 등으로 조작한 대표적인 시국사건 중 하나다. 이 사건으로 180명이 재판에 넘겨졌고, 배후로 지목된 ‘인민혁명당 재건위’ 관련자 8명이 대법원의 확정판결 다음 날인 1975년 4월9일 사형당했다. 그러나 국정원 과거사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200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함께 민청학련 사건이 조작됐다고 밝혔고, 그 뒤 재심 무죄 판결과 국가 손해배상 판결이 이어졌다. 서 교수 등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지난 2013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그런데 원고 중 3명이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위원회)’에서 생활지원금과 보상금을 받은 게 문제가 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5년 1월 “위원회 보상금 지급에 동의한 때에는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입은 피해 일체에 대하여 ‘재판상 화해’와 동일한 효력이 발생한다”며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승태 대법원장 때 법원행정처가 스스로 ‘사법부의 대통령 국정운영 뒷받침 협력 사례’라고 꼽은 판결 중 하나다. 재판부는 헌재 결정을 기다리기로 했고, 헌재는 지난 8월 “민주화보상법의 보상금에는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이 포함되지 않는다”며 관련 법 조항에 일부 위헌 결정을 했다.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받더라도 정신적 손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뜻으로 대법원의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헌재 결정에도 논란은 계속됐다. 정부가 같은 쟁점을 다투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 이소선씨 등 청계피복노동조합 손해배상 소송에서 “헌재 결정은 대법원이 인정하지 않는 ‘한정위헌’ 결정”이라 기존 대법원 판결대로 각하해 달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한정위헌’은 ‘법조문을 ~라고 해석하면 위헌’이라는 식의 위헌 결정 방식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법률 해석은 법원 고유의 권한이기 때문에 다른 위헌 결정과 달리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이다.
이날 판결로 ‘한정위헌 논란’은 일단락될 전망이다. 재판부는 “헌재는 민주화보상법 제18조 제2항의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입은 피해’ 중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손해에 관한 부분은 헌법에 위반된다고 선고했다. 법률의 위헌 결정은 법원을 기속하며, 위헌으로 결정된 법률 또는 법률 조항은 그 결정이 있는 날부터 효력을 상실한다”고 지적했다. 헌재 결정은 위헌 결정이기 때문에 법원이 따라야 한다는 의미다. “원고들이 보상금 지급 결정에 동의하고 수령했다고 하더라도 원고와 가족들이 피고의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하는데 어떠한 장애가 있다고 할 수 없다”며 재판부는 정신적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했다. 다만 관련 사건이 많아 재판부 마다 판단이 달라질 경우 대법원까지 다투게 될 가능성도 있다.
한편 재판부는 “수사관들은 각종 고문 등 극심한 가혹 행위로 허위 자백을 받아내 증거를 조작하여 구속기소했고, 유신헌법 체제의 유지 및 공고화를 위해 반국가단체를 구성했다는 허위사실을 언론에 공표했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니는 국가가 오히려 가해자가 되어 피고인들은 물론 가족들에 대하여 위헌적인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며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도 인정했다. 또 재판부는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할 의무가 있는 국가기관이 오히려 가해자가 되어 피고인들의 자유를 박탈한 조직적인 인권침해사건으로 그 위법성이 매우 크다”는 점을 고려해 당사자들에게 5억~8억원 등 위자료를 인정했다.
김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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