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된’ 20년 전 일실수입 기준 논란
국내 외국인 237만명·장기체류 167만명
다치거나 숨졌을 때 이주노동자 ‘일실수입’은
‘불법 체류자’ 문제되던 1998년 대법 판례 따라
“예상 체류 기간 2~3년” 한정해 손배액 결정
“외국인 구체적 사정 따른 합리적 판단 필요”
국내 외국인 237만명·장기체류 167만명
다치거나 숨졌을 때 이주노동자 ‘일실수입’은
‘불법 체류자’ 문제되던 1998년 대법 판례 따라
“예상 체류 기간 2~3년” 한정해 손배액 결정
“외국인 구체적 사정 따른 합리적 판단 필요”
3월24일 새벽 3시47분께 서울 지하철 2호선 서초역 사거리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태국인 사왓디(26·가명)는 왕복 11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했고, 달려오던 택시는 제한속도를 넘겼다. 사왓디는 근처 대학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며칠 뒤 숨졌다. 한국 정부가 뽑은 외국인 장학생으로 선발돼 2014년 3월 국내 대학교에 입학한 사왓디가 디자이너로 취업에 성공한 지 반년이 겨우 넘었을 때였다.
사왓디 유족과 택시기사가 속한 전국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택시운송조합) 사이에 손해배상을 둘러싼 다툼이 시작됐다. 사왓디가 살아서 한국과 태국에서 계속 일했다면 벌어들일 수 있었던 예상 수입 상실분(일실수입)을 두고 서로 다른 계산법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신입사원이었던 사왓디는 숨지기 전 월 330만원을 받았다. 유족은 사왓디가 한국에서 최소 20년을 일할 수 있었다며 우선 1억원을 청구했다. 태국에선 기술직 및 준전문직의 경우 한국돈으로 한달 70만원 정도받는다 한다(올해 초 기준). 반면 택시운송조합 쪽은 사왓디가 한국에서 일할 수 있는 예상 기간이 최대 3년에 불과하기 때문에 1억원은 과하다는 입장이다.
최근 서울 종로 고시원 화재에서도 50대 일본인이 숨졌다. 법무부는 지난달 기준 국내에 머무는 외국인이 237만여명이라고 발표했다. 이 가운데 사왓디처럼 석 달 이상 장기체류하는 외국인은 167만여명에 달한다. 국내 체류외국인 증가에 맞춰 ‘이웃집 찰스’ ‘대한외국인’ 등 외국인을 주인공으로 한 방송 프로그램까지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한국경제의 한 축을 맡아 일하다 숨지거나 다친 외국인의 일실수입 기준은 여전히 20년 전 기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체류 기간은 2~3년” 여전히 20년 전 기준
국내 체류 이주노동자의 경우 손해배상 소송까지 내며 일실수입을 따진 사례가 드물다. 있다 하더라도 명확한 기준 없이 대다수 이주노동자 비자(E9)의 국내 체류 가능 기간을 2~3년으로 본다. 이는 1998년 대법원 판례를 따른 것이다. 불법체류자가 사회 문제가 됐던 당시 ‘보수적으로’ 잡은 취업·체류 가능 기간만 국내에서의 수입을 기초로 하고, 이후에는 본국에 돌아가 벌어들일 수입을 바탕으로 계산하는 식이다. 쟁점은 국내 체류 가능 기간을 얼마로 보는지다. 중국·태국·베트남 등의 경우 한국보다 임금이 적어 국내 체류 기간을 길게 볼수록 배상 액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당시 대법원은 입국 목적, 본인 의사, 체류 자격 유무, 체류 기간 연장 개연성, 취업 현황 등을 두루 고려해 한국 체류 기간을 따져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1995년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중국 동포 ㄱ씨가 교통사고로 숨졌다. 당시 법원은 ‘중국인 조선족의 불법체류 실태’를 분석하면서 “외국인 근로자의 60%가 불법체류자다. ㄱ씨와 같이 단기 상용 입국비자를 받고 입국해 불법체류하거나, 밀입국으로 불법체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국내 불법체류 중국인 조선족의 체류 기간은 통상 2년”이라고 봤다.
20년이 흐른 뒤에도 체류 기간 판단은 여전히 ‘불법체류자 시대’ 언저리를 맴돈다. 2016년 법원은 공사현장에서 일하다 벽이 붕괴하는 바람에 골절 상해를 입은 중국인 ㄴ씨에게 업체는 1600여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ㄴ씨 쪽은 방문취업(H-2) 비자로 한국에 들어왔기 때문에 2018년까지 비자를 연장할 수 있고, 재외동포 비자(F4)를 취득하면 무기한 체류도 가능하다 주장했지만, 법원은 한국 체류 기간을 3년으로 제한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조영관 변호사는 19일 “비자의 종류, 입국 경위와 관련 없이 국내 체류 기간을 2~3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법원의 판단”이라며 “행정당국의 출입국 관리 편의에 따라서 2~3년 마다 해당 외국인의 비자를 심사하게 되는데, 그에 따라 자의적으로 설정된 체류 기간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사왓디 사건에서도 유가족 쪽은 사왓디가 전문 지식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특정활동 비자(E7)를 가진 상태에서 정규직으로 고용돼 장기간 국내 근무할 예정이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택시운송조합은 기존 법원 판례 등을 근거로 사왓디의 한국 체류 기간을 최대 3년으로 봐야 하며, 이를 기준으로 할 때 2018년 7월까지는 한국, 이후는 태국에서 얻었을 소득으로 손해배상액을 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취업비자 100만명 시대의 계산법은?
국내 체류외국인이 늘다 보니 산업재해나 교통사고 발생 비율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국회 자료(문진국 의원)를 보면, 2012년부터 지난해 5월까지 산재를 당한 이주노동자 수는 3만3708명이다. 이 가운데 사망자는 511명에 달한다. 불법체류 등을 이유로 통계에 잡히지 않는 재해도 상당수다.
고용허가제로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E9 비자)는 재고용허가를 받으면 2~3년이 아닌 최장 4년10개월까지 한국에서 일할 수 있다. 또 성실근로자로 인정받으면 추가로 4년10개월을 일 할 수 있다. 최장 체류 가능 기간이 3년에서 그 3배인 9년8개월로 늘어나는 셈이다. 최정규 변호사(원곡법률사무소)는 “국내 체류외국인의 일실수입을 계산할 때 취업 가능 기간이 언제까지인지, 체류 기간이 얼마나 될지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통상적으로 2~3년 체류하니 그 기간만 한국 임금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무조건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상정하고 일실수입을 따지는 계산법도 재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황필규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사망하거나 상해를 입은 외국인이 본국으로 돌아갈 시점 등은 피고가 입증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고 짚었다.
드물긴 하지만, 이주노동자의 ‘구체적 사정’에 주목한 판결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5월 서울중앙지법은 사망한 중국 동포 ㄷ씨 유가족에게 보험회사가 1억여원을 지급하라고 판단했다. ㄷ씨는 2015년 화물차에 들이받혀 숨졌다. 재판부는 방문취업 비자(H2)를 가진 ㄷ씨가 출·입국을 반복하면서 한국에서 3년, 중국에서 6개월씩 반복적으로 취업활동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고 한국(60살)과 중국(54살)의 육체노동 가동 연한을 고려해 ㄷ씨의 손해배상액을 계산했다.
법을 어긴 이주노동자라 하더라도 한국 체류 가능 기간을 융통성 있게 판단한 사례도 있다. 2016년 중국 동포 ㅂ씨는 음주운전 차에 받혀 숨졌다. 운전자 쪽 보험사는 ㅂ씨가 취업제한 업종(음식 서비스업)에 근무한 점을 들어 한국에서 출국 명령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판부 판단은 달랐다. ㅂ씨가 비록 취업제한 업종에 종사했지만, 그의 아버지가 한국 국적을 취득한 점 등에 비춰 ㅂ씨 역시 한국 국적 취득 가능성이 있었고 정부도 체류 연장을 허가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종철 변호사(공익법센터 어필)는 “이주 외국인 증가 시대에 맞춰 법원 역시 판단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 화재 현장.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지난해 5월22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출입구 위쪽에 법원의 상징인 '정의의 여신상'이 보인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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