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인 주아무개씨가 ㄴ(가명)씨를 영상 통화로 협박하는 장면. 김씨 누나 ㄱ씨 제공.
“경찰 신고 취하하는 걸 사진으로 보내라.”
“두고 보자.”
“신고하면 죽이겠다.”
협박을 담은 이 말들은 청각장애인 주아무개(36)씨가 또 다른 청각장애인 ㄴ(37)씨에게 휴대전화 영상 통화를 통해 수화로 전달한 메시지다. 이들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2일 서울북부지법과 피해자 ㄴ씨의 누나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ㄴ씨는 주씨를 2016년 오토바이 동호회에서 처음 만났다. 1급 청각장애인으로 문장 이해력이 떨어져 긴 문자나 글을 이해하는 걸 어려워하는 ㄴ씨에게 주씨는 적극적으로 호감을 보였다. 하지만 1년쯤이 지난 지난해 10월 초부터 주씨는 ㄴ씨에게 본격적으로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ㄴ씨가 돈 빌려주는 걸 망설이자 주씨는 “아버지가 양말공장 공장장이라 돈을 잘 버니까 금방 갚을 수 있다”며 ㄴ씨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주씨는 ㄴ씨에게 카드론과 현금 서비스 등을 통해 3000만원 상당을 빌려 가는 등 모두 4000만원을 뜯어냈다.
하지만 이후 주씨는 돌변했다. ㄴ씨를 자신의 집에 사실상 ‘감금’하고, ㄴ씨가 집을 벗어나려 하면 “나가면 돈을 돌려줄 수 없다”고 회유했다. 폭력도 썼다. 누나 ㄱ(41)씨가 동생 ㄴ씨의 상황이 수상하다는 걸 알게 된 건 지난해 10월 말쯤이었다. 집으로 4000만원에 달하는 카드명세서가 날아왔고, 이에 놀란 ㄱ씨가 여러 차례 동생 ㄴ씨에게 연락을 시도했는데 “굉장히 세련된 긴 문장”으로 답장이 온 것이다.
“동생은 평소 긴 문장을 쓰지 못하는데 이때 답장은 굉장히 세련되고 긴 문장이 왔어요. 왜 집에 안 들어오냐고 했더니 그냥 친구 집에 있다고만 하더라고요. 어디냐고 물으면 답이 없고요.” ㄱ씨의 말이다.
결국 ㄱ씨는 경찰에 동생 ㄴ씨가 실종됐다고 신고했다. ㄱ씨의 의심대로 ㄱ씨가 받은 문자메시지 답장도 주씨가 ㄴ씨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쓴 것이었다. 하지만 주씨는 실종 신고에도 기민하게 대응했다. ㄴ씨를 파출소에 직접 데려가서 실종해지신청서를 쓰도록 한 것이다.
이런 주씨의 행각은 사실상의 감금 2달 만에 ㄴ씨의 기지 덕에 경찰에 적발됐다. 지난해 12월 ㄴ씨의 카드 한도가 다 되어서 더 이상 돈을 빌릴 수 없게 되자 주씨는 ㄴ씨의 오토바이까지 팔아치우려 했다. ㄴ씨는 주씨를 태우고 수원의 한 오토바이 가게로 함께 향하면서 일부러 오토바이를 천천히 운전하며 누나에게 휴대전화로 도움을 청했다. 이에 ㄱ씨가 경찰에 신고를 했고, 경찰은 오토바이 가게에 잠복하다 주씨를 붙잡았다. ㄱ씨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주씨는 한겨울인 12월에 동생을 반팔 차림으로 집에서 쫓아낸 뒤에 동생이 빌어서 집에 들어오니까 3~4시간 동안 무릎을 꿇리는 벌을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주씨의 범죄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ㄴ씨 외에도 4명의 청각장애인을 대상으로 추가로 사기 행각을 벌였고, 5명에게 모두 1억7000여만원의 돈을 빼앗았다. ㄱ씨는 “주씨가 동생을 만나 3차원 롤러코스터를 태워주는 등 호감을 사려 노력을 많이 했다”며 “나중에 보니 주씨가 착하고 어리숙한 청각장애인들을 주로 표적으로 삼았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서울북부지법 형사7단독 이정엽 판사는 지난 14일 주씨에게 사기죄를 적용해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주씨는 현재 동부구치소에 수감 중이다.
게다가 이제 막 경찰이 추가 수사에 들어간 피해자도 있었다. 서울 도봉경찰서의 설명을 보면, 지난 15일 청각장애인 함아무개(46)씨 등 5명도 사기와 감금, 납치 혐의로 주씨를 경찰서에 고소했다. 이들은 피해 금액만 2억원이 넘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함씨는 <한겨레>와 만나 “주씨한테 돈을 빼앗긴 사람 중에는 주씨가 사람을 때리면서 차에 억지로 태운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며 “그 뒤에 돈을 빌려주겠다는 내용이 적힌 문서에 강제로 지장을 찍게 한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청각장애인이 주로 모이는 한 페이스북 페이지 관리자는 “주씨는 피해자를 협박해 은행에 가서 돈을 뽑아오라고 독촉한다고 한다. 대출 사무실에 억지로 데려가 대출도 강요한다고 들었다”며 “전국적으로 고소 못 한 피해자가 50명, 2015년부터 피해 금액이 50억원 정도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서울 도봉경찰서는 22일 “이 고소 사건들도 다른 사건과 병합해 기소 의견으로 송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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