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19일 저녁 5시59분. 쓰지 않는 노트북 앞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음원사이트 ‘멜론’ 누리집을 띄워놓고, 오후 6시 정각이 되면 곧바로 검색할 수 있게 검색창에 ‘워너원’이란 키워드를 미리 입력했다. 멜론 창 옆에는 또 다른 음원사이트인 ‘지니’와 ‘벅스’, ‘엠넷’, ‘네이버 뮤직’ 대기화면도 띄워뒀다. ‘총공’(총공격)을 위한 대기다. 오늘을 위해 평소 잘 쓰지도 않는 음원사이트 스트리밍 이용권을 모두 결제하고, 행여 실수라도 할까 싶어서 ‘컴백 이브’였던 전날 밤에는 스트리밍 예행연습까지 해둔 터였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누구의 팬도 아닌 ‘머글’(아이돌 팬이 아닌 사람을 일컫는 용어) 친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당연하지. 이러려고 돈 버는 건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받아쳤다. 휴대전화 너머로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날은 나의 ‘최애(최고로 애정함의 준말)’ 아이돌 워너원이 활동 종료를 앞두고 정규앨범을 발표하는 날이다.
‘오후 06:00’. 노트북 하단의 시계 숫자가 바뀌자마자 멜론에 들어가 워너원의 새 타이틀곡 ‘봄바람’ 재생 버튼을 클릭했다. 5개월 만에 보는 워너원 컴백의 감격을 곱씹을 틈도 없이 팬클럽에서 미리 안내한 ‘권장 스트리밍 리스트(권장 스밍 리스트)’에 따라 ‘봄바람’ 뒤에 이어질 재생목록을 만들었다. 권장 스밍 리스트란, 아이돌 팬클럽 차원에서 ‘팬들이 이런 순서에 따라 스트리밍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만든 목록이다. 스밍 리스트에는 신곡과 예전 타이틀곡이 골고루 포진되어 있는데, 이는 신곡의 순위와 이전 발표곡들을 모두 일정 순위 이상으로 유지하기 위한 ‘과학적 설계’의 결과다.
권장 스밍 리스트는 대부분의 음원사이트가 한 곡의 재생 횟수를 1시간에 1번만 인정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다시 말해, 특정곡을 1시간에 10번 재생한다고 해서 10번으로 인정되는 게 아니라 10번을 들어도 1번의 재생 횟수만 인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팬클럽은 1시간 동안 새로 발매한 음반의 모든 곡들이 1번씩 들어가도록 현재 발매된 음원과 예전에 발매한 음원을 적절히 섞어서 스밍 리스트를 만든다. 순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셈이다.
‘워너원 음원총공팀’에서 만든 스트리밍 리스트
권장 스밍 리스트의 세밀한 설계에 감탄하며 멜론을 공략하고 난 뒤, 순차적으로 다른 음원사이트에 들어가 비슷한 작업을 반복했다. 사실 워너원의 컴백 앨범 수록곡들을 순서대로 차분하게 들어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하지만 일단 각종 음원사이트에 컴백 앨범 타이틀 곡을 1위로 진입시키고, 전곡을 상위권에 노출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는 판단에 모든 개인적인 욕심은 버려두기로 했다.
그렇게 분주했던 10여분이 지나고 나서야 타이틀곡 ’봄바람‘의 가사를 찬찬히 읽어볼 시간이 생겼다. “더 잘해주지 못해/자꾸만 후회가 돼/내 맘은 그게 아닌데/늘 같이 있고 싶은데.” 애절한 가사를 보자니 스밍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전투력이 샘솟았다. 다른 팬들의 마음도 아마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봄바람’은 음원 발매 1시간 뒤 집계된 멜론, 벅스, 엠넷, 네이버뮤직, 소리바다 등 주요 음원사이트의 ’7시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워너원 음원차트 올킬”, “워너원의 독주는 계속된다”는 등의 기사가 쏟아졌다. 나같은 워너원 팬뿐 아니라 대부분의 아이돌 팬들은 좋아하는 아이돌이 음원을 발표하는 날 이런 문법으로 ‘스밍 총공’을 한다.
워너원이 지난 19일 주요 음원 사이트의 ’7시 차트’ 1위를 달성하자 쏟아진 기사들
■ 숨 쉬듯 돌리는 스트리밍, 팬들도 즐겁진 않아
‘숨스’와 ‘숨밍’. 숨스와 숨밍은 ‘숨 쉬듯 스트리밍한다’는 뜻의 줄임말이다. 아이돌 팬들이 각종 음원사이트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일상적으로 재생하는 것을 뜻한다. 음원만이 아니다. 유튜브에 올라온 뮤직비디오, 네이버 티브이(TV)캐스트 등도 틈날 때마다 스트리밍해줘야 한다. 높은 음원 성적과 뮤직비디오 조회 수 등을 위해서다.
워너원에 빠지기 전까지는 몰랐다. 스트리밍을 해야 하는 곳이 이렇게 다양한 줄은. 음원과 음반 순위를 매기는 방법도 이렇게 많을 줄은. 가령 멜론이라는 음원사이트 하나만 보더라도 실시간 순위뿐만 아니라 음원이 차트에 진입한 순위, 5분 단위로 점유율 순위를 매기는 5분 차트 순위, 해당 음원의 24시간 이용자 수 순위 등 다양하게 순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5분 차트의 경우 다음 5분 뒤의 ‘순위 예측’을 내놓기도 한다. 1, 2위 간 차이가 좁혀지면 ‘경합’이라고 표현하는 ‘경마식 시스템’도 가지고 있다.
멜론 하나가 이 정도니 그 밖의 주요 음원사이트 순위와 유튜브 시청 순위, 음반 초동(발매 뒤 일주일간 판매량) 순위, 음반 총판매량 순위, 음악방송 순위, 각종 시상식 투표까지 고려하면 ‘순위와의 전쟁’, ‘스밍과의 전쟁’이라는 말이 아깝지가 않을 정도다. 가끔은 내가 계속 듣고 싶은 노래를 반복재생하고 싶기도 하지만, 곧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한 곡을 반복재생해봤자 음원 순위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머리 한쪽에서는 정해진 순서대로 ‘무한 반복’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그러니까 스밍은 음원을 듣는 수단이라기보다는 순위를 가리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컴백이 팬들에게 되레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내 아이돌을 보는 건 너무 좋은데, 그들을 보는 순간에도 스트리밍은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그룹 빅뱅의 팬이라는 전아무개(29)씨는 “스밍은 음악을 즐기기 위해서라기보단 일종의 족쇄 같았다”며 “행여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인기 떨어진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을까봐 음원이 발매되면 음악을 듣지도 않으면서 스밍을 계속 돌렸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노가다와 다를 게 뭔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말했다. 워너원의 팬이라는 ㄱ(28)씨도 “에스엔에스에서 ‘팬이라면 스밍은 기본’이라는 얘기가 나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사람들은 순위를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스밍을 돌리는 때가 종종 있었다”고 했다. 스밍에 지쳐 찾아본 에스엔에스(SNS)에도 분노 섞인 글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화력이 예전 같지 않고 덕질하는데 스트레스받아요. 스트레스받기 싫은데(@Clo***)” 등과 같은 글이 허다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멜론 진입이용자 수와 발매 후 첫 24시간 이용자 수 차트. 인터넷 갈무리
■ 팬덤의 스밍 집착, 팬들만의 문제일까
팬들이 이런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스트리밍을 돌려야 하는 이유를 한 마디로 설명하긴 어렵다. 이유는 다양하다. 내 아이돌의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서, 팬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음원 성적과 유튜브 뮤직비디오 조회 수를 순위에 반영하는 음악방송 1위를 위해서, 연말 시상식 수상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도 이 노래를 많이들 들어줬으면 하는 마음에, 행여 음원 순위가 떨어지면 ‘내 새끼’가 실망할 테니까 등등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운 다양한 이유가 존재한다.
지난해 함께 엠넷 ‘프로듀스 101 시즌2’를 챙겨보며 워너원의 탄생에 기여했던 이들에게 물었다. ‘이런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스밍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워너원 팬으로 평소 멜론 스트리밍 정도는 꾸준히 하려고 한다는 20대 후반 ㄴ씨는 “마지막이니까 슬프지만 한다”고 말했다. “일단은 워너원이 활동을 마무리하며 낸 마지막 앨범이잖아. 예전에는 귀찮은 마음에 ‘나 하나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스밍을 적극적으로 하진 않았는데, 이젠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하게 되더라.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크지. ‘현업’ 때문에 올인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또 다른 20대 후반 워너원 팬 ㄷ씨는 물기에 젖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워너원 활동이 종료되고 나서도 내 ‘최애’가 지금만큼 최정상의 인기를 누릴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고. 아이오아이(‘프로듀스101 시즌1’으로 데뷔한 그룹) 멤버들도 각자 그룹이 크게 힘을 쓰지 못하고 있잖아. 물론 최애가 다른 그룹으로 활동하게 돼도 열심히 응원할 거지만, 워너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리게 해주고 싶어.”
문제는 스트레스 속에서 스밍 총공을 하는 팬들이 사회적 비판까지 감내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돌 팬들은 ‘음원 차트 획일화’ 문제에서 가장 공격받기 쉬운 대상이다. 일부 언론과 전문가들은 음원 차트가 팬덤의 ‘스밍 총공’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음원 순위가 팬덤에 의해 왜곡된다’며 불만을 쏟아낸다.
하지만 아이돌 팬들보다 음원 사이트를 중심으로 한 음악 산업이 더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5분 뒤 ‘예상 순위’를 공개하며 대놓고 경쟁을 부추기는 음원 사이트, 음원 사이트 성적을 주요한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는 음악방송, 어떤 그룹이 멜론 ‘지붕킥’을 했고 어떤 가수가 역대 최고 24시간 이용자 수를 기록했는지를 두고 보도자료나 기사를 쓰는 이들이 이 산업 구조의 중심에 있다는 얘기다.
정덕현 대중음악평론가는 “팬의 입장에서는 본인이 좋아하는 스타가 음원을 냈을 때 일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한 것”이라며 “음원 차트가 팬덤에 의해 좌지우지될 정도로 약해 실질적인 대중의 욕구나 취향을 반영하지 못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도 드레이크 같은 가수의 신보가 나오면 차트를 싹쓸이한다. 음반에서 음원으로 이동하는 데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이라면서도 “이런 상황이 지속하면 자본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는 제작자는 (음악을 제작할) 엄두도 못 내게 된다. 평등과 공평함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게 현재 음악 차트의 문제점”이라고 꼬집었다.
그렇다면 멜론 ‘탑100’ 차트 순위와 음악방송 순위가 전부인 줄 알았던 ‘머글’ 시절이 차라리 나았던 걸까.
신민정 기자
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