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복(62) 전 대법관이 사법농단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의 거듭된 조사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다른 전직 대법관들이 검찰의 비공개·공개 조사에 응하는 것과 대조된다.
이 전 대법관은 지난해 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대법원 1차 진상조사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그는 “사법부 ‘블랙리스트’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현재 검찰은 ‘판사 블랙리스트’를 기획하고 실행한 다수의 문건을 확보해 수사하고 있다.
검찰이 이 전 대법관을 조사하려는 이유는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겸임했던 그가 2014년 법원행정처의 개입 사실이 드러난 통합진보당 잔여재산 가압류 소송 ‘원고’인 중앙선관위와 행정처의 연결고리 구실을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검찰 관계자는 27일 “이 전 대법관은 통진당 가압류 소송과 관련해 ‘피의자성 참고인’이다. 두차례 비공개 조사를 요구했지만 ‘검찰 수사를 받아야 할 필요성이 없다고 본다’는 이유로 응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검찰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전 대법관의 조사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지난 14일 구속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공소장에는 이 전 대법관의 재판 관여 행위가 구체적으로 적시돼 있다. 2014년 12월19일 헌법재판소가 통진당 해산을 결정한 직후, 중앙선관위는 법원에 통진당 중앙당 및 시·도당이 보유한 예금채권에 대한 가압류를 신청했다. 법리적 논란이 불거지자 행정처는 청와대로부터 “가압류 적절성을 검토해달라”는 ‘법률 자문’ 요청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중앙선관위 위원장이던 이 전 대법관이 중앙선관위 직원들로부터 ‘선관위 내부 법리검토 및 전체 사건 현황’ 자료를 받아 행정처에 전달했고, 행정처는 다시 대법원 재판연구관 3명에게 법리 검토를 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에 재판연구관들은 ‘가압류보다는 가처분이 적절하다’는 검토의견을 냈고, 이는 전국의 통진당 사건 담당 판사들에게 전달됐다. 해당 판사들은 검찰 조사에서 “당시 의견을 검토하는 과정에 청와대나 중앙선관위가 개입한 것은 꿈에도 몰랐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결국 그 중간 연결고리를 이 전 대법관이 맡은 셈이다. 법조계 한 인사는 “최근 논란이 된 교사 아버지가 두 딸에게 답안지를 준 것과 뭐가 다르냐”고 지적했다.
이 전 대법관은 사법농단 사건을 법원 스스로 해결할 기회를 날려버린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해 초 이탄희 판사로부터 촉발한 ‘판사 블랙리스트’ 논란을 26일간 조사한 대법원 진상조사위원장이었다. 당시 진상조사위는 행정처가 제출한 자료를 중심으로 조사한 뒤 “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한 파일이 따로 존재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사법부 블랙리스트’가 존재할 가능성을 추단케 하는 어떠한 정황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단정적 조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검찰은 지난 6일 행정처 캐비닛에서 ‘블랙리스트’ 판사들을 찍어내는 방안을 검토하고 실행한 문건을 찾아냈다.
김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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