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유니온이 지난달 29일 국제영화제를 개최하는 5개의 지자체와 영화진흥위원회에 보낸 질의서. 청년유니온 제공
2016년 3월부터 2017년 11월 말까지 디엠지(DMZ) 국제다큐영화제 프로그램팀에서 계약직으로 일한 정아무개(37)씨는 계약이 만료되고나서야 자신이 정규직 전환 대상자였다는 걸 알았다. 2017년 10월 나온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은 업무가 반복·갱신되는 형태로 2년 이상 계속될 것이 예상될 경우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추진하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씨는 영화제 준비 기간에는 상영작을 수급하고, 영화제를 준비하지 않는 기간에는 아카이빙 업무를 하는 등 상시 업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영화제에서 일하는 20.5개월 동안 영화제 쪽의 요청에 따라 8개월, 1.5개월, 11개월로 세 차례 ‘쪼개기 근로 계약’을 맺고 근무했다. 정씨는 “정규직으로 전환됐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수차례 밝혔지만 정규직 전환 제안은 없었다”며 “정부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정규직 전환 대상이라는 어떠한 안내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디엠지 영화제는 경기도지사가 조직위원장을 맡고, 전체 예산의 약 80%(2018년 기준)를 경기도가 지원하고 있다.
청년유니온이 영화제를 개최하는 지자체와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에 “영화제 스태프의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해 책임 있는 답변을 내놓으라”며 공개질의서를 보냈다. 청년유니온은 지난달 29일 서울(서울국제여성영화제), 경기(DMZ국제다큐영화제), 부천(부천판타스틱영화제), 전주(전주국제영화제), 제천(제천국제음악영화제)등 지자체 5곳과 영진위에 △단기고용, 장시간 노동 및 임금체불 등의 문제가 있는 영화제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어떤 대책을 마련할 것인지 △재발 방지를 위해 어떤 조처를 할 것인지 등을 묻는 질의서를 보내고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고 4일 밝혔다.
청년유니온이 지난 10월 6대 영화제 스태프로 일한 34명의 근무조건을 조사한 결과 19명이 ‘쪼개기 계약’을 맺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청년유니온 제공
청년유니온의 설명을 종합하면 한국을 대표하는 이들 영화제는 대부분 ‘초단기 계약직’을 고용해 영화제를 꾸려간다. 청년유니온이 영화제 종사자 34명의 제보를 분석해 지난 10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청년유니온이 질의서를 보낸 5개의 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부국제)에서 일했던 34명 중 32명은 임시직이었다. 이들은 평균 3개의 영화제를 전전하는 동안 4.4개월짜리 계약을 맺고 근무했다. 같은 영화제에 계속 근무하면서도 2~3번에 걸쳐 초단기 계약을 맺은 경우도 22건에 달했다. 청년유니온은 “지자체들은 영화제로 발생한 경제적 효과와 문화적 가치 창출을 자신들의 성과로 가져가고 있다”며 “따라서 영화제를 만들어가는 청년들의 노동에 대한 책임 역시 지자체에 있다”고 강조했다.
초단기 계약을 맺고 근무한 이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했다. 초단기 계약자 ㄱ씨는 “당장 이번 계약이 끝나면 다음에도 일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고, 계약이 된다고 하더라도 언제까지 이렇게 (단기계약으로) 영화제에서 일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며 “나이가 들면 영화제는 단기계약직으로도 뽑아주지 않는데, 정규직이 되지 못하면 결국 영화제 판을 떠나야 한다”고 토로했다. ㄴ씨는 “(영화제) 프로그램팀 계속하다가 팀장 되고 프로그래머 되고 사무국장 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며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한국 영화제 구조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단언했다. 디엠지 영화제에서 약 2년 간 3번의 쪼개기 계약을 했던 정아무개씨 역시 “영화제는 ‘지자체 예산이 없어서 안정적 (고용이) 안된다’고 말한다”면서 “그렇다면 그들이 스태프들의 안정적 고용을 위해 무슨 노력을 했는지 보면 아무것도 없다. 소모품처럼 사람들을 쓸 뿐”이라고 밝혔다.
청년유니온이 지난 10월 6대 영화제 스태프 시간 외 수당 지급 여부를 조사한 결과 5개의 영화제에서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청년유니온 제공
영화제가 임박하면 야근이 상시로 이뤄졌지만, 수당이 지급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청년유니온 조사를 보면, 영화제 개최 전 1개월간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3.5시간(주 평균 67.5시간)에 달했지만, 디엠지영화제를 제외한 부산국제영화제 등 5곳은 모두 시간 외 수당을 주지 않았다. 부산국제영화제는 계약직 스탭 149명에 대해 1억2400만원의 임금을 체불하기도 했다. 이에 오거돈 부산시장과 이용관 부국제 이사장 등은 지난달 22일 “올해 미지급된 시간 외 근로수당에 대해 부산시와 재원 확보 방안을 논의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시정하겠다”며 “관행적으로 운영되어온 상황에 대해 무한한 책임과 문제 해결에 대한 의무감을 갖고 있으며, 국내 모든 영화제와 협력하여 새로운 롤 모델을 만들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청년유니온은 부산국제영화제의 사례를 볼 때, 질의서를 보낸 나머지 4곳의 영화제 역시 시간 외 근로에 대한 체불임금액이 상당할 것으로 보고 있다.
청년유니온이 질의서를 보낸 영화제 가운데 4일 현재 답변을 보낸 곳은 전주국제영화제 한 곳 뿐이다. 시간외 근무수당 체불, 임시직에 대한 포괄임금계약 등을 지적받은 전주영화제 쪽은 3일 청년유니온에 보낸 답변에서 “전주국제영화제는 ‘영화표현의 해방구’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국내 유수의 영화제들에 비견될 만큼 성장하였지만, 현재 노출된 청년 임시직 스태프의 임금 부분과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며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체불임금이 지급되도록 조치하겠으며, 이런 사건이 재차 발생하지 않도록 예산수립·편성 과정에서부터 임시직 스태프 임금과 노동조건이 법과 제도에 부합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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