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1. 김아무개씨는 회사에서 ‘고구마를 안 뒤집었다’는 이유로 상사에게 혼이 났다. 신입사원인 김씨는 회사에서 상사가 먹을 옥수수와 고구마의 껍질을 까서 구워야 했는데, 굽던 고구마를 제때 뒤집지 않았다는 이유로 꾸지람을 들은 것이다. 김씨는 상사의 흰머리 뽑기, 라면 끓이기, 안마, 상사가 먹다 남긴 음식 먹기 같은 ‘갑질’도 감내해야 했다. 잡무에 시달린 김씨는 결국 1년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를 그만둘 때도 상사는 김씨에게 ‘사회생활을 못해서 나가는 거다, 다른 회사에도 취업을 못 할 것’이라는 폭언을 했다. 김씨는 “처음 입사한 회사였고 사회생활인 줄 알고 다 했는데, 점점 자존감이 낮아지고 저 자신이 하찮아졌다”며 “나중이 되어서야 갑질이라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사례2. 직장인 ㄱ씨는 대표이사 때문에 회식자리가 괴롭다. 직원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폭음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대표는 직원들에게 냉면 사발에 술을 섞어 억지로 먹이는가 하면, 중국집에서는 다 먹은 짜장면 그릇에 술을 부어 다 마시도록 강요한 적도 있다. 회식 때마다 폭음과 음주 강요가 반복되지만 직원들은 이 같은 술자리에 빠지기도 어렵다. 술자리를 거절했다가 회사생활이 힘들어질 것 같아서다. ㄱ씨는 고민 끝에 이 내용을 직장갑질119에 제보했다.
노동시민단체 직장갑질 119가 올해 하반기에 접수한 황당한 직장갑질 사례를 23일 공개했다. 이들은 7월1일∼12월22일까지 이메일로 접수한 1403건의 직장갑질 제보를 ‘노예’, ‘여성’, ‘갈취’, ‘폭언’, ‘폭행’, ‘황당’ 등으로 분류하고 이 가운데 50개의 사례를 공개했다.
구체적인 제보내용을 보면 폭언이나 폭행 같은 갑질은 여전히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직장인 ㄴ씨의 상사는 ㄴ씨가 작성한 서류에 틀린 부분이 있다는 이유로 커터칼을 들어 ㄴ씨의 왼손을 붙잡고 손가락을 자르려고 했다. ㄴ씨가 따지자 상사는 ‘내 손이 아니고 네 손이니까 괜찮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주말에 자녀를 데리고 워터파크에 간 ㄷ씨는 들어간 지 30분 만에 ‘임원이 업장을 방문했는데 당직 간부가 없다’는 이유로 회사로 복귀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내에게 아이를 맡기느라 늦게 돌아간 ㄷ씨에게 직장상사는 ‘뭐하는 ××냐’, ‘누구는 애 없냐’ 등의 폭언을 했다고 한다. 레스토랑에서 주방일을 하는 ㄹ씨는 사장으로부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먹으로 가슴을 맞거나 목이 졸리고 욕설을 들었다. 결국 정신과에서 급성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다.
성폭력을 겪은 이에게 2차 가해를 하거나 임신·육아휴직을 계획하는 여성노동자에게 폭언을 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ㅁ씨는 ‘내가 결혼만 안 했으면 너 어떻게 해보고 싶었다’, ‘연애하자’ 등의 성희롱을 한 상사를 본사에 신고했다가 상대방으로부터 ‘무고죄로 고소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또 다른 상사는 ㅁ씨에게 ‘왜 본사에 얘기해서 일을 크게 만드냐, (가해자가) 아내에게 뭐라고 얘기하겠냐’ 등의 2차 가해를 했다고 한다. 유치원 교사 ㅂ씨는 “임신 계획 중이라 퇴사하겠다”고 말하자 상사에게 “퇴사하면 블랙리스트로 만들어서 동종업계에 뿌리겠다” 같은 말을 들었다. ㅅ씨는 직장에 임신 사실을 알렸다가 “육아휴직 내면 돌아올 자리는 없다”란 말을 들었다고 했다.
이밖에도 직장갑질119는 ‘직원에게 대표의 밭에서 난 옥수수 수확과 판매를 지시한 일’, ‘근무외 시간에 단체카톡방에 100개 이상의 메시지를 보내고 확인이 늦었다고 괴롭힌 일’, ‘폭행한 손님을 신고하자 사장이 합의를 종용하고 이후 해고한 일’ 등의 사건을 하반기 갑질 50선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직장갑질119는 “하반기 제보 사례를 살펴본 결과 지난해 언론에 크게 보도됐던 장기자랑과 김장 동원은 6개월 동안 각 2건으로 상당히 줄어들었다”면서도 “폭행·폭언, 괴롭힘, 잡일 강요 등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직장갑질119는 이와 함께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산업안전보건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이 오는 27일 본회의에 통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개정안은 직장 내 괴롭힘을 정의해 피해자를 보호하고(근기법 개정안), 직장 내 괴롭힘 예방을 위한 지원을 정부 책무사항에 포함하며(산안법 개정안), 정신적 스트레스로 이한 질병을 업무상재해 인정기준에 포함한다(산재보험법)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직장갑질119는 “대한민국 직장인들은 황당한 갑질을 당해도 신고할 곳을 찾지 못해 고통받고 있다”며 “올해 국회에서 ‘직장내괴롭힘금지법’이 통과되지 않는다면, 직장갑질로 고통받는 직장인들의 공분이 대한민국 적폐 1번지 국회로 향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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