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11일 오후 경기 이천시 대월면 군량리의 한 구제역 발생 농가에서 돼지 살처분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이천/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가축 살처분 작업 참여자들의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해 ‘심리치료 안내를 의무적으로 실시하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의 권고가 나왔다.
인권위는 살처분 참여자들의 심리적 안정과 정신적 회복을 위해 이들에게 ‘심리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무적으로 안내하라고 농림축산식품부장관에 권고했다고 4일 밝혔다. 또 심리적·신체적 증상 체크리스트 등을 마련해 살처분 작업 뒤 점검하고, 고위험군을 조기에 발견해 치료 신청을 독려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라고 덧붙였다. 인권위는 보건복지부장관에 지난해 4월 문을 연 국가트라우마센터에서 앞으로 살처분 참여자 트라우마를 조사·연구하고 효과적인 심리 지원 체계를 마련하라고도 권고했다.
인권위는 “대표적 가축 전염병인 구제역과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면서 살처분에 참여했던 공무원 등이 자살이나 과로로 연이어 사망하는 등 살처분 트라우마의 심각성과 심리 지원의 문제가 대두됐다”며 “이후 재난심리회복지원단 운영, 국가트라우마센터 설치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살처분과 관련해서는 경제적, 방역적 관점이 우선시되고 참여자의 정신건강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다소 부족하다”며 이번 권고의 검토 배경을 밝혔다.
현행 ‘가축전염병예방법’은 살처분 참여자가 6개월 안에 신청할 경우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심리적·정신적 치료비용을 지원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무기력감과 우울감 등을 경험하고 특히 트라우마를 일으킨 사건에 대해 다시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 이른바 ‘회피 반응’을 보여 스스로 적극적인 상담과 치료를 신청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게 인권위의 설명이다. 인권위는 트라우마가 반드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절한 조처를 취하면 고위험군의 유병률을 감소시킬 수 있으므로 이들에 대한 심리 지원이 활발히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2014년 전북 부안군 줄포면 신리 한 오리농장에서 방역당국 관계자들이 오리들을 살처분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인권위는 살처분 참여자 4명 가운데 3명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보였다는 조사 결과도 덧붙였다. 인권위가 2017년 실시한 ‘가축매몰(살처분) 참여자 트라우마 현황 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살처분에 참여했던 공무원·공중방역 수의사 268명 가운데 76%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보였고, 23.1%는 중증 우울증이 우려됐다. 이들은 학살의 참여자가 된다는 죄책감, 살처분 작업이 매년 반복되는 것에 대한 무력감 등을 호소했다. 살처분 트라우마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한 축협 직원에 대해 법원이 업무상 재해를 인정한 사례도 있다. 약 350만 마리의 소와 돼지를 살처분했던 2010~2011년 최악의 구제역 사태 당시 살처분 매몰 작업에 참여했던 축협 직원은 숙직을 서다가 동물 마취용 근육이완제를 주사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가 맡았던 업무는 갓 태어난 어린 새끼를 포함해 돼지를 산채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는 일이었다. 인권위는 “당시 공무원 등은 자신들의 역할과 영향에 대해 충분히 교육받지 못한 상태에서 살처분 작업을 수행한 탓에 여기서 발생하는 심리적 문제에 대해 대처능력을 가지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며 살처분 작업 전 심리적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예방교육 매뉴얼을 개발하라고 농림축산식품부에 권고했다.
인권위는 나아가 “동물의 고통을 줄이고 신속하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도적 살처분을 시행하는 것이 동물복지에 부합할 뿐 아니라 살처분 참여자의 트라우마를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며 일선 방역 현장에서 동물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약물을 주입하는 약물주입법 등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인권위는 살처분 작업에 공무원이나 공중방역 수의사뿐 아니라 일용직 노동자나 이주 노동자들의 참여가 늘어남에 따라 이들에 대한 실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건강 보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특히 외국인의 경우 연락처와 소재지 파악이 허술하고 의사소통도 어려워 전염병 예방과 관리의 사각지대가 발생하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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