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혹 제기부터 양승태 소환까지 20여개월
이인복·임종헌·박병대 등 사법농단 관여 의혹 판사들
혐의 부인했지만 부메랑으로 되돌아온 그들의 ‘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1일 오전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하기 전, 대법원 앞에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이 자리에서 국민 여러분들에게 우리 법관들을 믿어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사법농단’ 사태의 정점에 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1일 오전 9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청사에 출석하기에 앞서 대법원 ‘담벼락’ 앞에 섰다. 아직 대법원장인 양 “우리 법관들을 믿어주시라”고 호소했다. 재판 개입 및 법관 블랙리스트가 없었다는 자신의 주장이 “변함없는 사실”이라고 했다. 검찰 수사에서 수집된 증거에 대해서는 “선입관”이라고 일축했다.
2017년 3월 처음 관련 의혹이 제기되고 지난해 6월부터 검찰 수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를 받아 ‘손발’ 역할을 했던 법원행정처 판사들의 ‘말’들도 함께 쏟아졌다. “사법부 블랙리스트는 찾아내지 못했고”, 판사들은 “그야말로 사심 없이 일했”으며, 혹여 의혹이 있더라도 “부적절할 수는 있으나 죄가 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무엇보다 “대법원의 재판은 순수하고 신성한 것”이므로 누구도 재판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점차 거짓말로 드러나고 있는 ‘판사들의 말들’을 돌아봤다.
①이인복 전 대법관 “사법부 블랙리스트는 찾아내지 못했다”
이인복 전 대법관. <한겨레> 자료사진
“사법부 블랙리스트가 존재할 가능성을 추단케 하는 어떠한 정황도 확인되지 않았다.”
2017년 4월, 이인복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대법원 1차 진상조사위원회(진상조사위)는 “사법부 블랙리스트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진상조사위는 법원행정처가 제출한 자료를 토대로 한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한 파일이 따로 존재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사법부 블랙리스트’가 존재할 가능성을 추단케 하는 어떠한 정황도 확인되지 않았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진상조사위의 ‘단정’이 무색하게, 이후 수사에 나선 검찰은 법원행정처가 2012년부터 2017년까지 하드카피(종이문서) 형태로 작성한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보고서’를 찾아냈다. 검찰에 따르면, 법원행정처는 ’불이익을 주는 방안’과 ‘주지 않는 방안’을 담은 문건을 보고했고, 양 전 대법원장은 직접 볼펜으로 브이(V) 표시를 해 최종 결정을 했다.
오히려 진상조사위의 위원장이었던 이인복 전 대법관이 ‘사법농단’의 ‘조연’격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인복 전 대법관은 지난해 12월 ‘피의자성 참고인’으로 검찰에 출석해 비공개로 조사를 받았다. 검찰은 이 전 대법관이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겸임하던 2014년 법원행정처의 개입 사실이 드러난 통합진보당 잔여재산 가압류 소송의 ‘원고’인 중앙선관위와 행정처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당시 조사에서 이 전 대법관은 행정처의 검토보고서를 ‘참고’ 목적으로 선관위에 전달한 사실을 인정했다.
②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부적절할 수 있으나 죄가 되지는 않는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핵심 인물로 꼽히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해 10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부적절할 수 있으나 죄가 되지는 않는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사법농단의 ‘행동대장’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받고 있는 혐의만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소송 △통합진보당 행정소송 및 재산 가처분신청 사건 △고용노동부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 처분 소송서류 대필 △부산 법조비리 은폐 △박근혜 전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 형사사건 개입 혐의 등으로 사법농단 의혹 전체를 망라한다.
지난해 10월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를 받게 된 임 전 차장 쪽은 “부적절할 수는 있지만 죄가 되지 않는다”는 독특한 논리를 폈다. 문건과 진술 등 부인하기 힘든 사실관계를 인정해 구속은 일단 피하되, ‘그게 범죄는 아니다’라는 논리로 이후 재판에 대비하려는 전략이었다. 특히 박근혜 청와대와 양승태 대법원 간의 대표적인 재판거래 의혹 사안인 ‘일제 강제노역 손해배상 소송’과 관련해서는 “판사는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들어야 한다. 재판부에 여러 의견을 참고로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 검찰이 재판 구조를 모른다”고 ‘역공’을 펼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름 계산된 전략에도 불구하고, 영장실심사를 담당한 서울중앙지법 임민성 부장판사는 “범죄사실 중 상당 부분에 대해 소명이 있고,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어 구속의 필요성과 상당성이 인정된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현재 사법농단 의혹 연루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구치소에 수감 중이다.
③박병대 전 대법관 “그야말로 사심없이 일했다”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된 박병대 전 대법관이 지난해 11월 오전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법관으로 평생 봉직하는 동안 최선을 다했고 법원행정처장으로 있는 동안에도 그야말로 사심 없이 일했습니다.”
지난해 11월19일 오전 9시20분께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현관 앞에 선 박병대 전 대법관은 “그야말로 사심 없이 일했다”고 말했다. 전직 대법관이 검찰에 공개 소환된 건 박병대 전 대법관이 처음이었다. 검찰은 2014년 3월부터 2016년 2월까지 법원행정처장으로 일했던 박 전 대법관을 양승태 전 대법원장, 고영한 전 대법원장과 함께 사법농단 사태의 진앙으로 보고 있다.
박 전 대법관의 혐의는 임 전 차장 못지 않게 광범위하다. 그가 법원행정처장일 당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2014년 10월에 소집한 이른바 ‘2차 공관회동’에 참석해 청와대, 외교부와 징용 소송 처리 방향을 논의한 사실이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났다. 이외에도 헌법 재판소의 내부 동향을 수집하고, 통합진보당 관련 재판에 개입했으며, 법관 사찰과 소모임을 와해하려 시도했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박 전 대법관은 검찰 조사에서 ‘후배들이 알아서 했다’는 취지로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법관은 “업무는 (법원행정처 담당) 실장 책임으로 하는 것”이라며 임 전 차장 이하 후배 판사들에게 책임을 넘긴 것으로 전해졌다. 옛 통합진보당 관련 재판 개입 의혹에는 “억지로 (재판 절차나 판결을) 바꾸라는 뜻은 아니었다”고 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은 ‘원론적이고 정당한 지시’를 내렸지만 후배 판사들이 ‘과잉 대응’했다는 논리인 셈이다.
검찰은 박 전 대법관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법원은 “범죄 혐의 중 상당 부분에 관해 피의자와의 공모관계 성립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이후 박 전 대법관은 지난 8일 검찰에 다시 비공개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④양승태 전 대법원장 “대법원의 재판은 정말 순수하고 신성한 것이다”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된 박병대 전 대법관이 지난달 19일 오전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대법원의 재판은 정말 순수하고 신성한 것입니다.”
지난해 6월 1일, 경기도 성남시 시흥동 동산마을의 자신의 자택 인근 놀이터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양 전 대법원장 재임 시절 법원행정처가 재판거래를 시도하고 판사의 뒷조사를 했다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특조단)의 조사결과가 나온 뒤 일주일만으로, 양 전 대법원장이 처음으로 공식 입장을 밝히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재판에 부당하게 간섭 관여한 바 없다”, “법관에게 어떤 편향된 조치를 하든가 아니면 불이익을 준 적이 전혀 없다”고 단언했다. 또 “대법원의 재판은 정말 순수하고 신성한 것”이라며 “대법원의 재판 신뢰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재판은 정말 순수하고 신성한 것”이라 천명한 지 7개월여가 흐른 11일, 양 전 대법관은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됐다. 검찰은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이 임종헌 전 차장의 혐의를 분리해서 적용받았다면, 양 전 대법원장은 이렇게 나누어진 혐의들을 종합해서 적용받는다”며 사법농단의 ‘몸통’으로 양 전 대법원장을 지목했다.
양 전 대법원장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일제 강제노역 손해배상 소송 상고심이 진행 중일 때 양 전 대법원장이 일본 기업을 대리하는 김앤장 법률 사무소의 변호사를 직접 만났다는 사실이 검찰 조사로 드러났다. 법원행정처에서는 그가 자필로 서명한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검토’ 문건도 발견됐다.
양 전 대법원장은 11일 오전 검찰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이 사건에 관련된 여러 법관들이 자기들 직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법관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고 저는 그 말을 믿고 있다”고 했다. 재판을 “정말 순수하고 신성한 것”이라 정의했던 양 전 대법원장은 이제, 스스로 공정한 재판을 거래 수단으로 전락시켰다는 무수히 많은 증거를 상대로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하는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다시 무수히 많은 말들을 쏟아내야 할 테고, 그 말들은 지금처럼 다시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지 모른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