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법원행정처 소속 직원들이 ‘뒷돈’ 수억원을 받아 챙긴 뒤 퇴직자에게 수백억원대 사업을 몰아주는 등 20년 가까이 ‘뒷배’를 봐 준 사실이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사법부 독립’을 명분으로 법원 조직을 폐쇄적으로 운영해 온 것이 그 원인으로 지적된다.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부장 구상엽)는 ‘법원 정보화사업 입찰비리’에 연루된 전·현직 법원 공무원 5명을 구속기소한 데 이어, 전자장비 납품업체 관계자 10명을 입찰방해 혐의로 추가로 불구속 기소했다고 14일 밝혔다. 이들은 지난 4일 구속기소된 전직 법원 직원 남아무개씨(47)가 법원 직원 4명의 도움으로 497억원대의 법원 발주 사업 36건을 수주하는 과정에서 ‘들러리’를 서준 혐의를 받고 있다.
조사 결과, 2000년 법원 전산주사보(7급)로 일하던 남씨는 동료 직원들의 권유로 퇴직한 후 전산장비 납품업체를 설립한다. 남씨는 동료 법원 직원들의 도움으로 20년 가까이 법원 발주 사업을 독점해온 것으로 조사됐다. 법원행정처 직원들은 남씨의 업체에 법원이 발주한 사업들을 몰아준 뒤 남씨 등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법원행정처 직원들은 입찰 과정의 편의를 봐준 대가로 남아무개씨로부터 2011년부터 7년에 걸쳐 현금 3억3000만원을 뇌물로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 남씨가 운영하는 업체로부터 법인카드를 받아 약 4년 동안 3억원가량을 개인 생활비 등에 썼다. 아울러 이들은 명절 무렵 모두 500만원 상당의 상품권, 최신형 대형 티브이, 최고급 가전제품, 골프채 등을 모델명까지 구체적으로 지정해 받아 챙기고, 식당과 유흥주점에서 각종 향응까지 제공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남씨에게 뇌물을 받은 법원행정처 직원들은 그 대가로 남씨의 업체가 판권을 독점한 제품 사양에 맞춰 법원 전산화사업 입찰 제안을 하거나, 관련 기밀을 빼네 남씨 등이 지정한 업체가 사업을 독점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했다. 가령 이들은 남씨의 업체에서만 독점적으로 납품할 수 있는 고사양의 외국산 실물화상기를 사업 조건으로 내걸었고, 남씨는 이 조건에 맞춰 국산의 경우 40∼80만원에 불과한 실물화상기를 수입원가의 2배가 넘는 500만원 가격에 납품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업계에선 ‘남씨를 통하지 않고는 법원 전산화 사업을 수주할 수 없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 결국 관련 업체들은 남씨에게 줄을 대기 위해 뒷돈을 주거나, 심지어 남씨를 통해 사업을 수주한 후 남씨의 회사에 일감의 상당량을 떼어 주는 방법까지 동원했다. 또 전산장비 납품업체들은 남씨가 운영하는 업체로부터 납품기회를 제공받기 위해 ‘들러리’를 서주거나, 법원 사업실적을 늘리면서 일정액 수수료를 얻기 위해 대리로 입찰에 참여하기도 했다.
검찰은 법원행정처에 관련 예산, 인력, 조직, 운영 등의 권한이 집중된 상황에서 투찰업체에 대한 기술력 평가까지 소수의 법원행정처 직원들이 폐쇄적으로 수행하는 구조적 문제를 이번 비리의 원인으로 꼽았다. 검찰 관계자는 “다른 국가기관의 경우 대부분 조달청이 객관적인 위치에서 기술적 평가 등을 수행하고 있다”며 “법원 전산화사업의 경우 발주 제안과 평가 절차를 사실상 법원행정처가 모두 수행하고 있고 조달청은 창구역할에 그쳤다”고 지적했다. 임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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