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정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 박사, 류태호 고려대 교수, 허정훈 중앙대 교수(왼쪽부터)가 21일 오전 서울 마포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린 좌담회에 참석해 한국 스포츠가 나아갈 길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국민체육을 진흥하여 국민의 체력을 증진하고, 건전한 정신을 함양하여 명랑한 국민 생활을 영위하게 하며, 나아가 체육을 통하여 국위선양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국민체육진흥법 1조)
체육정책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1962년 제정 국민체육진흥법의 첫머리는 ‘국위선양’을 명시하고 있다. 국가의 영광을 드높여야 한다는 이 문구는 지상명령이었다. 지도자들은 국위선양을 하려고 선수들을 때렸고, 국가 역시 국위선양 잘하라고 스포츠 인권을 사각지대로 방치했다. 국민은 메달의 달콤함에 빠졌다. 하지만 조재범 사건으로 엘리트 선수 중심의 정책은 붕괴 직전에 놓였다. 신뢰를 상실한 한국 스포츠의 활로는 무엇인가? 류태호 고려대 교수, 성문정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 박사, 허정훈 중앙대 교수 등 체육 정책 전문가를 21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진행자 조재범 사건을 계기로 한국 체육의 참담한 민낯이 드러났다. 왜 지금 이런 일이 터졌나?
류태호(이하 류) 체육계 폭력, 성폭력의 위험성은 오래전부터 잠복해 있었다. 이미 10여년 전인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초등생 성폭력 보고서를 냈고, 2009년엔 ‘인권 가이드라인’과 ‘스포츠 인권 헌장’까지 만들어 관심을 기울였다. 그 뒤 어쩐 일인지 단절됐다가 지난해 미투를 기점으로 체육계 내부 고발도 발화점에 이르렀다.
성문정(이하 성) 조재범 사건은 해방 이후 한국 체육 정책의 설계가 파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십차례 선수 보호를 위한 제도화가 이뤄졌지만 결국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올림픽 톱10, 톱5라는 최면에 걸린 국가와 대한체육회가 관리·감독에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허정훈(이하 허) 지도자의 폭력이 수십년간 누적돼왔고, 선수가 숨지는 일도 벌어졌지만 지나면 그만이었다. 체육계 인권 유린의 불감증은 사회에 만연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시민들의 의식이 바뀌었다.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메달을 따는 것에 강한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진행자 스포츠는 즐거운 것인데 한국의 스포츠는 고지 점령전 같은 전투가 연상된다.
류 한국 체육의 프레임이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것으로 돼 있다. 초등학교 때 선수로 뽑히면 그는 공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또래와는 전혀 다른 시스템으로 들어간다. 혹독한 훈련과 공간적 격리 속에 선수는 소년체전, 전국체전, 국가대표, 올림픽 메달의 전사로 양성된다. 이들을 관리하는 지도자, 각 연맹, 체육회는 선수를 볼모로 권력 싸움을 벌인다. 그것을 국가가 관리해야 하지만 ‘국위선양 해야 돼’ ‘메달 따야 돼’ 하면 넘어가는 형태가 돼왔다.
성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정책을 현장에서 수행하는 대한체육회의 우선순위는 엘리트 선수 육성에 맞춰져 있다. 재정이 들어가는데 공무원들은 당연히 지표 관리가 중요하니까 대회 성적이라는 산출에만 몰입한다. 국가대표 선수를 선수촌에서 연 260일 이상 합숙시키는데, 토·일요일, 명절, 공휴일 등 공식 휴일 수를 빼도 나오지 않는다. 이런 나라는 전 세계에 없다.
허 엘리트 선수 육성에는 포화 상태가 될 정도로 예산 지원이 이뤄졌다고 본다. 지도자도 선수 성과에 의해 생계를 보장받는다. 국제대회에서 꼭 성적을 내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진행자 개별 종목의 적폐도 심각하다.
허 대한빙상경기연맹을 보면 여론의 뭇매를 맞으니까 외부 전문가까지 불러 태스크포스를 만들지만, 내부에 또 패거리가 있다. 대의원까지 파벌로 갈린다. 합리성이나 공정성 없이 애초부터 라인을 잡고 올라가다 보니 대립이 일상화됐다. 내부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류 적폐를 얘기할 때 개인을 단위로 ‘누가 나쁜 놈이다’ 식으로 싸우다 보면 해법을 찾을 수 없다. 개인의 일탈보다는 더 포괄적으로 조망해야 방향이 보인다. 제도와 관행, 조직과 정책이 시대정신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그것이 적폐다. 만약 현재의 시스템이 잘못돼 있다면 정부는 구조를 바꾸기 위해 나서야 한다.
진행자 시급하게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있을까?
성 국민체육진흥법 1조의 국위선양 네 글자를 폐기해야 한다. 이 말 때문에 대한체육회나 문화체육관광부의 성적 지상주의가 정당화돼왔다. 메달 더 따야 하니까 극한의 경쟁체제로 몰아가고 선수 인권엔 눈감는다. 선수에게 평생연금, 병역혜택을 주는 것도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지도자가 선수를 비인간적으로 폭행하면서 ‘너를 위해서’ ‘조금만 더’를 강요하는 게 말이 되는가.
류 1970년대식 학교·생활·엘리트 체육의 구분에서 벗어나야 한다. 체육 정책을 ‘모든 사람이 스포츠에 참여하도록 한다’라는 전제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거기서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나오고 능력과 기술의 차이가 나게 된다. 그것을 수준별로 관리할 수 있도록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진행자 엘리트 선수 충원 기지 구실을 해온 학교도 바뀌어야 할 것 같다.
류 조재범 사건의 피해자가 있었던 시공간은 초등학교를 포함해 학교였다. 유도의 신유용 선수도 학생 선수였다. 교육부는 뭐 하고 있었나? 이들을 안전한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도록 해주지 못한 것에 뼈저린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성 대한체육회나 대한장애인체육회에 등록할 때만 선수 자격을 얻는 규정을 바꿔야 한다. 선수의 자격이 제한되다 보니 2006년부터 정부가 학교 등에서 시행하는 클럽스포츠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전국체전에도 엘리트 선수들만 나간다. 제도적 장벽 때문에 클럽과 엘리트 선수들이 유기적으로 교류하고 상생할 수 없게 돼 있다.
허 문체부 교육부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 등 정부 부처 간의 정책 협의 부조화도 문제다. 컨트롤타워가 없는 부처 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국가체육위원회를 만들거나 체육청을 만들어 통합해야 한다. 정부 부처의 공동 책임이 공동 무책임이 돼서는 안 된다.
진행자 한 부분만으로 해소될 수 없는 총체적인 문제 같다.
류 교육부는 입시와 학생 선수의 문제가 있고, 문체부는 체육 정책, 대한체육회나 지자체는 대표선수 관리·육성 등과 관련이 있다. 생활체육단체도 내부 권력 다툼이 심하다. 지도자의 경제적 이익도 결합되다 보니 입시, 파벌, 대립 등 다양한 문제가 나온다. 구조 개혁의 시각이 필요하다.
성 체육특기자 입시에서 전국대회 8강 기준은 없앴지만 여전히 대학 자체에서 나름의 기준을 갖고 있어 지도자가 성적에 몰두하게 된다. 또 대학에 들어간 선수들에게 학업성취도 강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개인 지도자를 제공하거나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운동할 수 있는 시설이 미비한 등 재정·환경적 여건이 열악하다. 교육부가 좀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진행자 한국 스포츠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면?
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증요법으로 가지 말고, 원인요법으로 가야 한다. 진단을 제대로 못 하면 또 허송세월이다. 국가가 스포츠의 가치를 무엇으로 규정할지, 어떤 가치를 부여할지 고민해야 한다. 국민체육진흥법 1조에 이제는 ‘국민의 건강’ ‘아름다운 삶’ ‘행복’ 등 건강과 여유, 즐거움이라는 스포츠 본래의 가치를 담아내야 한다.
성 지난해 문체부가 2030 스포츠 비전의 내용을 제시했다. 좋은 내용이 수사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경쟁이 기본인 스포츠에서 메달을 포기할 수 없지만 운동선수들이 자신의 진로를 설정할 수 있고, 운동부에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자유롭게 해줘야 한다. 은퇴 후 설계까지 ‘이중의 대비’를 할 수 있도록 선수들을 지원해야 한다.
진행자 앞으로 스포츠 강국이란 말을 쓰거나, 메달에 목매서는 안될 것 같다.
류 그렇다. 이제는 스포츠 강국이 아니라 스포츠 문화 선진국 같은 용어를 써야 한다. 강국이라는 단어에 발목이 잡혀서는 조재범 사건은 결코 해소될 수 없다. 지도자나 선수들은 일종의 대중적 모델이다. 이들이 안정된 틀에서 살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사회의 의무다.
진행·정리 김창금 기자
kim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