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시설인 경기도 김포 '향유의집'에서 지내는 김성훈(가명)씨가 지난해 12월20일 오후 복도에서 햇볕을 쬐고 있다. 박윤경 기자
시설에서 장애인들은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자신들을 눈앞에서 지우고 싶어하는 사회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2009년 6월4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중증장애인 8명이 비리 장애인 시설인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벗어나 자립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이른바 ‘마로니에 8인’이었다. 농성은 사회가 원하는 삶에서 탈주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후 10년. 서울시는 장애인 자립을 지원하는 장애인전환서비스지원센터를 만들었고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은 장애인들의 지역 사회 통합을 꿈꾸는 ‘향유의집’으로 바뀌었다. <한겨레>는 ‘석암투쟁’ 10주년을 맞아 장애인 자립의 어제와 오늘을 되짚어 본다. 두번째 차례로 석암투쟁이 시작됐던 2009년 당시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 거주했던 장애인 123명의 삶을 추적했다.
지난달 20일 낮 12시55분 경기도 김포 장애인거주시설 ‘향유의집’ 별관 3층. 김성훈(가명)은 무릎으로 기어서 상을 자기 앞에 가져다 놓고 앉았다. 오후 1시 정각에 시작될 점심 준비다. 5분이 지나자 생활교사가 점심밥을 가져와 식판에 담은 뒤 김성훈의 상에 올렸다. 향유의집에는 김성훈처럼 치아 상태가 좋지 않은 이들이 많다. 생활교사들이 음식을 가위로 잘게 잘라놓은 까닭이다. 김성훈은 숟가락만으로 밥과 국, 반찬을 떠먹었다. 젓가락은 쓸 수 없다. 숟가락 드는 힘이 약해 음식이 식판에 자꾸 흘렀다.
55살 김성훈은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다. 뇌병변 장애가 주장애, 지체 장애가 부장애다. 하반신을 거의 움직이지 못한다. 방 안에서나 같은 층에서 움직일 때는 무릎을 지지대 삼아 팔심으로 이동한다. 밖으로 나갈 땐 전동휠체어를 탄다. 이날 오전 8시, 처음 인사를 나눴을 때 김성훈은 기자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질문해도 답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치아가 고르지 못해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김성훈의 말을 다른 이들이 잘 알아듣지 못해 점점 말수가 줄었다고, 향유의집 사무국장 최선영이 대신 말했다.
김성훈은 별관 3층에서 중증장애인 6명과 함께 산다. 1인실 1개, 2인실 2개, 3인실 1개 등 방이 4개이고, 화장실은 2개를 함께 쓴다. 식사를 마친 김성훈이 믹스커피를 꺼냈다. 종이컵에 믹스커피 두 봉지를 한꺼번에 담고, 물을 좀 많이 부어서 휘휘 저어 먹는 게 김성훈의 방식이다. 커피를 너무 좋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잘 내어주지 않는다고 한다. 오전 시간을 의미 없는 티브이 리모컨 돌리기로 보냈던 김성훈은, 점심 이후에는 휴대전화로 음악을 들었다. ‘추억 7080’이라는 앱을 켜서 노래를 골랐다. 어떤 노래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니 종이를 꺼내 ‘1980-1989’라고 썼다. 1980년대 노래를 좋아한다는 의미냐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4시부터는 재활동에서 생활재활교사의 도움으로 팔을 접었다 피는 운동을 했다.
오후 6시, 점심과 다름없는 방식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이후 또다시 예능 프로그램과 종교방송, 명사 강연 등 5시간 동안 티브이 채널이 의미 없이 돌아가다가, 오후 10시30분 “삑” 소리와 함께 티브이를 껐다. 김성훈의 하루도 함께 꺼졌다. 26살이던 1990년, 향유의집 전신인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 처음 들어와 29년 동안 김성훈의 일상은 늘 오늘과 같았다. 볕이 좋은 날 복도에 나와 따스함을 느끼는 정도가 되풀이되는 일상에서 한 발짝 벗어난 이벤트다. 일주일에 1~2번 야학이나 복지관에 가는 날이 특별할 정도다. 시설 밖은 춥기도 하도 덥기도 하고 맑기도 하고 비나 눈이 오기도 하고 때론 천둥과 벼락도 치지만, 김성훈의 삶은 늘 정물화처럼 고정돼 있다.
“우리 따뜻해지면 또 밖에 나가자, 성훈씨. 어디가 좋을까?” 향유의집 팀장 정영미가 물었다.
“서울. 여의도.”
“여의도는 왜요?”
“꽃 보고. 라면.”
“아~ 벚꽃도 보고 거기 한강에서 라면도 먹고? 우리 밤에 한강에서 라면도 먹었었죠? 또 가면 라면 내가 쏠게요.”
김성훈은 환한 웃음으로 답했다. 그 환한 웃음처럼 김성훈도 탈시설을 꿈꾼 적이 있다. 하지만 부모님이 반대하고 있어 용기를 내지 못했다. 홀로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밤에 혼자 있는 게 무서울 것 같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활동보조인을 24시간 이용할 수 있어. 24시간이 아니라 16시간만 된다고 해도 시간을 조정해서 낮에는 잠시 혼자 있다가 밤에 같이 있으면 되지.” 함께 이곳에 있다 자립한 중증 뇌병변 장애인 한규선이 김성훈을 만나러 향유의집에 와서 말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반대해.”
“우리 집에 한 번 모셔와라. 내가 사는 걸 보면 마음이 달라질 거야. 나도 혼자 사는데 왜 네가 못 사냐. 우리가 내일모레 60인데 언제까지 내 집 한 칸 없이 살 거냐.”
“바깥은 길을 잘 몰라.”
“다녀보면 어차피 다 알게 돼. 나도 처음엔 두려웠는데 지금은 제주도도 혼자 다녀왔어.”
그러자 김성훈이 갑자기 즐거워진 얼굴로 “나도 제주도 간 적 있다. 서울에 백화점 갔을 때도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대화가 끝나갈 무렵, 김성훈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엇이 김성훈의 탈시설 자립을 가로막고 있는 걸까.
■ “가족은 자립의 적”
10년 전 ‘석암투쟁’이 시작됐을 때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 살았던 장애인은 모두 123명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김성훈처럼 정물화 같은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10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겨레>가 2009년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지냈던 123명의 삶을 추적해본 결과, 아직까지 향유의집에 남아 있는 이들은 시설 밖 주택에서 자립생활을 체험해볼 수 있는 체험홈에서 지내는 6명을 포함해 모두 53명이다. 10명은 다른 시설로 옮겨 지내고 있고, 6명은 가정으로 돌아갔다. 25명은 숨을 거두었다. 자립을 선택한 이들은 29명이다.
자립한 29명을 자세히 살펴보니, 자립 당시 보호자가 등록돼 있던 경우는 10명(34.5%)에 불과했다. 나머지 19명(65.5%)은 가족이나 지인 등 보호자가 한 명도 등록되어 있지 않은 ‘무연고자’였다. 반면, 시설에 남아 있는 53명 가운데 ‘무연고자’는 30.2%(16명)뿐이다. 보호자가 있는 이들이 되레 자립하기보다 시설에 더 많이 남아 있는 셈이다.
일본 장애인단체 장애인차별과싸우는공동연합회는 장애인 자립의 ‘3대 적’ 가운데 하나로 가족을 꼽은 바 있다. 입소자 부모 대부분은 안전을 위해 자녀를 시설에 보낸다. 24시간 직원들과 함께 생활하면 적어도 다칠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향유의집 사무국장 최선영은 “입소자 부모 대부분은 ‘우리 애가 어떻게 시설 밖에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지’ 납득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어떤 활동지원사를 만나게 될지 알 수 없고,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가 일어나는 등 위험요소가 가득한 시설 밖보다는 시설 안에 자녀가 거주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자립한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적다는 사실도 이러한 우려와 관련 있다. 자립한 29명 가운데 남성은 21명이지만 여성은 8명에 불과하다. 10명 중 7명이 남성인 셈이다. 전체 123명과 입소자 53명의 성비와 견주어봐도 자립한 경우에 여성 비중이 제일 작다. 부모는 비장애인 여성에게 위험한 사회가 장애인 여성에게는 더욱 위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설에 거주 중인 정은혜(가명)의 아버지는 장애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뉴스를 본 적 있다며 “은혜는 조금도 걷지 못한다. 그런 (범죄) 위험을 쉽게 피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토로했다.
시설 밖으로 나오면 부양 부담이 커질 것을 우려하는 부모도 많다. 한 입소자의 어머니는 “나도 이제 늙어서 누군가한테 부양을 받아야 한다. 딸의 하루를 책임질 형편이 전혀 되지 못한다”며 딸이 계속 시설에 있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자립한 하상윤 역시 아버지의 심한 반대에 부닥쳤다. 하상윤이 반대를 무릅쓰고 탈시설한 뒤 입소비를 내러 온 아버지가 뒤늦게 하상윤의 자립을 알고 크게 화를 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시설에 보내는 부모 입장도 이해는 갑니다. 같이 데리고 살면 완전히 자기 인생이 없어지는 거잖아요. 아는 분 중에 30년 넘게 발달장애 아들을 키우는 분이 계시는데, 통제하기도 힘들고 성인 남성이라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엄마한테 몸을 비비기도 한다고 해요. 엄마는 어디에도 그런 고충을 말할 수 없죠. 남편도 모든 걸 다 엄마한테 맡기고 ‘다 네 탓’이라고만 한대요. 그 엄마는 인생이 너무 불행하지 않나요?” 한 항유의집 관계자의 말이다.
이는 오랫동안 장애인 부양을 온전히 가족에게 맡기고, 그들을 죄인처럼 내몬 한국 사회가 낳은 비극이다. “2011년 활동지원서비스(당시 활동보조서비스)가 도입되기 전까지 가족들이 모든 돌봄을 도맡았어요. 그 시기를 겪은 가족들 입장에선 이제 정책이 바뀌었다 한들 부양 부담이 여전히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김정하 프리웰재단 이사장의 설명이다.
이날 전남 여수의 원가정으로 복귀하기로 결정 난 노인 장애인인 김명수(가명)도 비슷한 경우다. 평소 고향을 그리워했던 김명수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을 꼭 여수에서 마무리하고 싶어 했다. “김명수씨 가족분들도 참 좋은 사람들인데, 결국 여기 시설에 보내게 됐죠. 긴 병에 효자 없다잖아요. 너무 생활이 힘드니까. 하지만 시설에 보내놓고도 가족들이 계속 마음 무거워했는데, 결국 데려가네요. 노인들은 귀향하는 게 맞아요. 잘 된 일이에요.” 항유의집 생활재활교사 박종순(57)이 말하자 다른 교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족들과 유대 관계가 깊을수록 자립이 어려워지는 모순도 벌어진다. 김성훈이 그런 경우다. 김성훈은 부모님과 여동생이 한 달에 세 번은 시설에 찾아오고 매일 전화통화를 한다. 향유의집에서도 유달리 가족 관계가 끈끈한 편이라고 한다. 김성훈은 김포장애인자립센터를 지속해서 방문하고 “나만의 집에서 자유로운 삶을 꾸리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자립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김성훈의 가족은 그를 만나면 “시설에 있는 게 좋다. 되도록 시설에서 살자”고 설득하곤 한다. 김성훈은 ‘자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자립한 형이 밥 먹고 싶을 때 먹는 게 부럽다”며 “나는 아마 (자립)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가 “아직 잘 모르겠다”며 여러 번 답을 바꿨다.
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을 하고 있는 하상윤씨가 지난해 12월13일 오후 자신의 집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살펴보고 있다. 하상윤씨는 아버지의 반대로 오랫동안 자립을 하지 못해왔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 지적장애인은 탈시설에 어려움을 겪는다
장애 유형도 탈시설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한겨레>가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 살았던 장애인 123명의 장애 유형을 파악해 보니, 자립한 29명의 주장애는 97%가량이 ‘지체장애’나 ‘뇌병변장애’였다. 뇌병변장애가 19명(65.5%), 지체장애가 9명(31.0%)였고, 지적장애는 1명(3.5%)이었다. 지체장애와 뇌병변장애는 각각 골격·근육·신경과 뇌 기능에 이상이 생겨 나타나는 신체 장애다. 지적장애는 학습, 추론 등 지적능력에 제약을 받는 장애다.
현재 향유의집에 남아 있는 53명의 주장애는 자립 장애인들과 다소 차이를 보였다. 향유의집 거주자도 뇌병변장애가 23명(43.4%)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자립 장애인들과 달리 지적장애가 30.2%(16명)로 지체장애(14명·26.4%)보다 많다. 주장애 뿐 아니라 부장애로 범위를 넓혀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시설 장애인 가운데 주장애와 부장애 중 하나라도 지적장애를 가진 사람이 60.4%(32명)로 전체의 절반이 훌쩍 넘지만, 자립은 24.1%(7명)에 불과하다. 지적장애인은 상대적으로 자립한 이들이 적고 시설에 많이 남아 있다는 얘기가 된다.
전문가들은 지적장애인의 자립 비중이 적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우선 자립은 장애인 당사자가 원한다는 의사를 밝혔을 경우에 한해 이뤄지는데, 지적장애인은 이처럼 의사를 분명히 표현하기가 어렵다. 자립 의사가 수시로 바뀌는 것도 자립을 어렵게 만든다. 향유의집 관계자는 “지적장애인은 시설 직원들에게 어떤 말을 듣느냐에 따라 자립 의사가 시시각각 바뀐다”고 말했다. 가령 자립생활에 대해 호의적인 말을 들으면 체험홈이나 자립지원주택 구경에 흔쾌히 나서지만, ‘나가서 어떻게 살려고 하느냐’ ‘혼자서 다 할 수 있을 것 같냐’ 등의 얘기를 들으면 바로 생각을 바꾸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시설을 나간 이후 적절한 지원을 받기 힘든 점도 자립을 가로막는 장벽이 된다. 현재 활동지원서비스가 신체 장애인 중심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활동지원서비스는 혼자서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운 장애인과 활동지원사가 일대일로 연결돼 가사·이동 등의 활동을 돕는 것이다. 현재 중증장애인은 한 달에 47~118시간 활동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심사를 거쳐 구체적인 시간을 배정받는다. 김정하 이사장은 “심사 질문이 신체적 역량을 묻는 데에만 집중돼 있어 지적장애인은 자신의 필요보다 훨씬 적은 시간을 배정받는다”고 주장했다. 가령 지적장애인은 걷는 데 무리가 없어도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는데, 심사할 때는 ‘걸을 수 있는지’만 물어보기 때문에 지적장애인의 어려움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는 또 “내년 3월부터 발달장애인 2500명을 대상으로 주간활동서비스가 추가로 제공될 예정이지만 이 역시 모든 지적장애인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 시설에서 기본 20년…최대 32년을 사는 사람들
김성훈과 같이 20년 넘게 시설에 사는 경우는 향유의집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다. 현재 입소자들의 평균 입소 기간은 23.1년이다. 대부분 40~50대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20~30대 청년 시절부터 중년까지 20년 이상을 향유의집에서 보낸 것이다. 그나마 23.1년은 실제 평균 입소 기간보다 축소됐을 가능성이 크다. 향유의집에 살기 전 다른 장애청소년 거주시설을 거쳐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의 전신인 강서재활원 시절부터 거주했던 입소자들도 있다. 향유의집은 1986년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이 설립된 이후의 기록만 갖고 있을 뿐이다. 가령 최영수(가명)는 향유의집 자료엔 1986년부터 거주했다고 기록돼 있지만, 강서재활원에 거주했던 기간을 정확히 알 수 없다. 향유의 집에는 최영수처럼 ‘공식’ 입소 기간이 32년인 ‘최고참’이 열 명이다.
생활재활교사 박종순은 시설을 “오로지 생활을 위해 최적화된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생활과 관련된 건 안정적으로 제공되지만 그 이상을 누릴 순 없다는 뜻이다. 시설 입소자들에겐 제때 삼시 세끼가 제공되고 따뜻하게 잠을 잘 공간도 주어진다. 하지만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는 누리기 힘들다. 누군가의 보호나 감시 없이 자유롭게 하루를 보내기 어려운 셈이다. 대부분 2~3인실에서 생활하고 화장실은 8명가량이 2개를 함께 쓴다. 본관과 별관 모두 복도 양 옆으로 방이 배치된 구조인데, 직원들은 복도를 걸어 다니면서 수시로 좌우에 있는 방들을 들여다본다. 방문은 대부분 열려 있다. 의사 표현이 쉽지 않은 시설 입소자들의 경우 문을 닫고 싶은 의사가 반영되기 쉽지 않다. 이날 항유의집에서도 문이 열려 있는 것을 개의치 않고 기저귀를 갈고 있는 남성 장애인, 복도에서 하반신을 모두 벗은 채 호스로 소변을 보고 있는 여성 장애인의 모습이 목격됐다. 이들은 그 상태로 기자와 눈을 마주치면서도 눈빛에서 아무런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식사는 물론 목욕도 입소자가 원하는 시간이 아닌 시설에서 정해진 시간에 이뤄진다. “누구 한 명이 소리 지르면 여기 건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잠을 못 자요. 한 명이 발가벗고 뛰어다니면 모든 사람들이 다 그 모습을 봐야 해요. 내 공간, 나만 쓰는 공간, 이런 게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공간을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니까 여기서 진짜 수십 년을 산다고 생각하면 돌아버릴 수도 있는 거지.” (생활재활교사 박종순)
현재 향유의집 입소자 53명 가운데 6명은 시설에서 운영하는 체험홈에서 살고 있다. 김성훈 역시 시설 밖 삶을 두려워하면서도 시설을 나가 밖에서 살아가는 형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즐긴다. 향유의집에는 지금도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 ‘존엄과 자유’ 그리고 ‘시설 밖 삶’을 열망하는 이들이 살고 있다.
특별취재팀
‘좋은 시설’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1981년 설립된 ‘석암재단’은 장애인 자립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곳이다. 석암재단은 애초 서울에서 석암재활원, 석암베데스다요양원 등 장애인 시설을 운영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가 장애인 시설을 ‘혐오시설’로 간주해 서울 밖으로 밀어내면서 경기도로 이전했다.
비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싹텄다. 석암재단 이사장 일가가 장애 수당을 빼돌려 국고보조금을 횡령했다. 2007년 서울시 특별감사에서 드러난 사실이다. 석암재단 시설 입소인과 장애인 단체들은 2008년 3월 서울시청 앞에서 ‘비리법인 설립허가 취소’를 요구하는 농성을 했다. “한겨울에도 저녁 시간 말고는 난방이 안 돼 추위에 떨며 지내야 했다” “추석 때 구청이 준 상품권을 재단에서 가져갔다” “동물처럼 대우받았다”는 호소가 쏟아졌다.
투쟁은 탈시설 자립 운동으로 이어졌다. 석암재단 시설 입소인 8명이 2009년 6월4일부터 62일 동안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농성하며 장애인 자립 제도 마련을 요구했다. 이른바 ‘마로니에 8인’이다. 서울시는 곧 자립생활가정 시범운영을 약속했다. 한국에서 장애인 자립 지원 시스템이 최초로 마련된 순간이다.
“시설 개선에는 한계가 있어요. 인권이 덜 침해되는 구조를 만든다고 해서 인권침해가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의 후신인 향유의집을 운영하는 김정하 프리웰재단 이사장은 2008년의 싸움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애초 김 이사장은 시설에서 일어나는 학대와 비리만 없애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농성에 참여한 입소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다시는 시설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 그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좋은 시설’이란 불가능하다.” 그때부터 김 이사장은 비리보다 시설 자체에 주목했다.
물론 향유의집은 석암베데스다요양원과 전혀 다르다. 외출도 자유롭고, 배달 음식도 시켜 먹는다. 하지만 한계도 명확하다. 한 명이 여러 명을 관리할 수밖에 없는 시설에서는 장애인들이 자신의 의사에 따른 독립생활을 하기 힘들다. 시설을 운영하는 프리웰재단이 장애인들의 자립 지원 사업을 추진하는 까닭이다. 재단은 올해 안에 지방자치단체 등이 마련한 30개 자립지원주택에 향유의집 입소자 53명이 거주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주택 한 곳에 1~2명의 장애인이 사는 거죠. 지자체가 장애인 거주 주택을 확보하면, 재단은 이들이 독립해서 살 수 있도록 돕는 방식이에요.”
우려도 있다. 여전히 가족들은 ‘안전’을 우려한다. 김 이사장도 우려를 이해한다고 했다. 하지만 시설이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는 게 김 이사장의 생각이다. “한 명이 여러 명을 관리하면 장애인들이 자신의 건강 상태에 맞춰 식사나 외출을 하거나 약을 먹는 일이 어려울 수 있어요. 지역사회와 고립돼 있다 보니 학대 등 범죄도 끊이지 않고 있고요.”
김 이사장은 그래도 가족들의 우려, 그리고 장애인 당사자의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의 재정적·행정적 지원이 더 늘어야 한다고 했다. 시설에서 일해온 직원들의 고용 대책 마련도 필요하다. 다만, 더는 자립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거스를 순 없다. “위험 요소가 있다면 줄여야죠. 위험이 있다고 해서 인간다운 생활을 포기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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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 : 24시팀 정환봉 권지담 김민제 박윤경 이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