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생계를 책임지는 ‘가모장’ 아내들도 명절이 괴롭다. 명절 기간에는 시집의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제사 음식 준비를 도맡아 해야 한다. 연합뉴스
“며늘아, 이제부터 네가 가장이다.”
조민지(45·가명)씨는 지난해 설 때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아버지에게 이런 ‘덕담’을 들었다. 자영업을 하다 일을 그만둔 남편이 전업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혼한 뒤에도 줄곧 일한 조씨는 이제야 시댁에서 공인한 가장이 된 셈이다. 그때 그 말을 듣고 조씨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 말의 무게는 무거웠다. 조씨는 “많이 부담스러웠다”라며 “경제적 활동이 어려운 내 아들을 부탁해라는 말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집안의 최고 권력자라는 의미보다는 돌봄 책임자가 된 느낌이었다는 얘기다.
“내 아들을 부탁해”라는 말처럼 들려
조씨 부부는 2년 전 고심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일을 그만둔 남편이 또다시 불안정한 일자리를 갖느니 두 딸을 키우고 살림하는 게 낫다고. 이런 결정을 내린 뒤 가족의 삶은 많이 변했다. 장사하며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하던 남편은 주부가 된 뒤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조씨는 남편이 아이들을 돌보니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게 됐단다.
구나영(42·가명)씨 부부 역시 전통적인 성역할을 바꿨다. 구씨는 직장에 다니고 남편이 육아와 가사를 책임진다. 아이가 생긴 뒤 둘 중 한 명이 아이를 돌봐야 했다. 양가 어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육아도우미를 쓰기에는 비용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영화 연출 스태프로 일하며 수입이 일정치 않은 남편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전업주부를 택했다.
외벌이가 된 뒤 구씨는 직장생활에 지쳐 힘들 땐 경제적 문제를 나눠 질 수 없다는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장점이 더 많다. 아이가 아프거나 갑자기 야근해야 하는 등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남편이 집에 있으니까 이런 상황에 대처할 수 있어 마음이 편하단다. 무엇보다 아이가 아빠와 오랜 시간 함께하며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부부가 전통적인 성역할을 바꿨지만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는 가부장적인 집안 분위기에 맞춘다. 집에서 주부 역할을 하던 남편은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구씨는 주방에서 명절 음식을 준비하고 설거지를 한다. 구씨는 “시댁에선 함께 음식을 준비하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주방에 남자들이 들어오지 않고 가사는 여자의 몫”이라고 말한다. 오직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에 따라 누군가는 일하고 누군가는 쉰다. 그는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남편에게 “‘니네 집 제사니 설거지라도 해보라’는 얘기를 하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남편 이철호(39·가명)씨는 일하는 부인이 명절 때 일할 것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집안 분위기를 지금 당장 바꿀 자신이 없단다. 부모님 눈치도 봐야 하고 괜히 나서서 집안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눈치 보여서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러다보니 구씨는 “명절에 시댁에서 내가 하는 일이 밥상 차리고 치우는 일뿐이니 이 정도는 그냥 하자라는 마음”이라며 “그래도 시부모님이 아들을 불러 설거지라도 시키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뤄졌으면 한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바람을 품고 ‘가모장’ 구씨는 명절 때마다 ‘가부장제의 나라’로 간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