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돌연사한 윤한덕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은 최근 ‘자동심장충격기’라는 말 대신 ‘심쿵이’라는 친근한 용어를 사용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이 제안에는 응급 상황에서 선한 의도로 다른 사람을 도운 이들이 부당한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한 윤 센터장의 배려가 숨어 있다.
윤 센터장은 지난해 10월2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심정지 환자의 생존율 개선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목격자에 의한 자동심장충격기(bystander AED) 사용”이라며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적 관련 법규를 잘 알고 있는 나로서도 심정지 환자를 보면 그 기계를 함부로 사용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만약 사용하고 나면 설치자가 내게 그 비용을 청구하지 않을까 의구심이 든다”고 했다. 그는 이어 미국의 ‘선한 사마리아인법’을 언급하며 “‘네가 위험하지도 않은데 왜 돕지 않은 거냐?’는 식으로 구호 의무를 강조하는 유럽의 선한 사마리아인법과 달리 미국에서는 구호했을 때 면책을 강조한다”며 “(그 법의) 근본에는 일종의 합의가 있다. ‘네가 도우려고 한 것이니, 잘못이 있어도 용서해줄게’이다”라고 지적했다.
2011년 개정된 한국의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도 모든 사람은 성별, 나이, 민족, 종교, 신분, 경제력, 국적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응급의료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생명이 위급한 응급환자를 돕다가 생긴 피해에 대해서는 형사책임을 지우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다.
제 3조 (응급의료를 받을 권리 ) 모든 국민은 성별 , 나이 , 민족 , 종교 , 사회적 신분 또는 경제적 사정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아니하고 응급의료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도 또한 같다 .
제 5조의 2(선의의 응급의료에 대한 면책 ) 생명이 위급한 응급환자에게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응급의료 또는 응급처치를 제공하여 발생한 재산상 손해와 사상 ( 死傷 )에 대하여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는 경우 그 행위자는 민사책임과 상해 ( 傷害 )에 대한 형사책임을 지지 아니하며 사망에 대한 형사책임은 감면한다 .
그런데도 윤 센터장은 “법이 있어도 ‘내가 면책을 받을 수 있을지’ 누구도 확신하지 못한다. 구호에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측은 변호사를 통해 무차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고, 그러면 구호자 역시 변호사를 선임해 방어해야 한다”며 “그다음부터는 변호사끼리의 ‘돈놀음’이 되는 것이다. 결국 정당성을 인정받더라도 그 과정 자체가 고통이다. 차라리 남의 일에는 관심을 끄는 게 편한 세상이 된 것이다. 누군가 옆에서 쓰러지더라도 ‘나는 스마트폰을 보느라 못 본’ 척해야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매번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말이 유행처럼 떠돌지만, 이것만큼은 국가가 개입하지 않고 해결하기 어렵다”며 “만약 보건복지부가 ‘쓰러진 사람을 도우면 당신에게는 어떤 불이익도 없어요’라는 포스터를 방방곡곡에 구석구석 덕지덕지 붙여놓으면 어떨까?”하고 제안했다. 윤 센터장은 “그러면 구호를 받은 측이 손해배상을 청구해도, 그 포스터를 가리키며 ‘보건복지부가 괜찮다고 해서 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며 “개인적으로 ‘자동심장충격기’라는 어려운 말 대신 ‘심쿵이’라는 용어를 밀고 있다. 언젠가는 심쿵이(자동심장충격기)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부착되어 있기를 바란다”고 썼다.
고 윤한덕 센터장이 지난해 10월26일 페이스북에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제목의 글을 쓰며 ‘자동심장충격기’라는 말 대신 ‘심쿵이’라는 친근한 용어를 사용하자고 제안하며 함께 올린 사진
그가 ‘심쿵이’에 부착되길 바란 문구는 아래와 같다.
1. 응급환자에게 이 기계를 사용하면 누구도 당신에게 배상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
2. 사용법을 정확히 모르더라도 과감하게 사용하십시오 . 다행히 기계가 굉장히 친절합니다 .
3. 쓰러진 사람을 보면 적극적으로 도우십시오 . 그로 인해 겪게 될 송사는 보건복지부가 책임지겠습니다 .
4. 도움을 요청하면 언제든 응하십시오 . 그로 인해 겪게 될 송사는 보건복지부가 책임지겠습니다 .
5. 당신이 남을 돕지 않으면 누구도 당신을 돕지 않게 됩니다 .
6. 당신이 할애하는 십여분이 누군가에게는 수십년의 시간이 됩니다 .
7. 심폐소생술을 배우고 싶다면 , ○○○○번으로 전화하십시오 . 교육만 받아도 고성능 무선청소기를 무료로 드립니다 .
이상 보건복지부 장관
윤 센터장은 지난 4일 오후 5시50분께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 2층 자신의 사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돼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그는 응급의료 전용 헬기를 도입하고, 재난·응급의료상황실과 응급진료 정보망 시스템 등을 구축하는 데 앞장서온 응급의학 전문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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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규 기자 j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