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달 2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1993년 1월15일 오전 10시25분 서울 서초동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 청사 앞에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당시 통일국민당 대표)이 탄 쏘나타 승용차가 멈춰 섰다. 대선 패배 뒤 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던 그는 ‘왕회장’답게 당일 아침에야 검찰에 “오늘 조사를 받겠다”고 ‘통보’했다. 이 소식을 들은 취재진 50여명이 청사 앞 계단 주변에 브이(V)자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정 회장이 차에서 내리자 국민당 관계자와 취재진 사이에 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누군가에게 떠밀린 한 사진기자의 카메라가 정 회장의 머리를 때렸다. 2~3㎝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이듬해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와 한국사진기자협회는 ‘포토라인 운영 선포문’을 발표했다. 이후 현실 세계는 물론, 영화와 드라마에서 숱하게 재현된 ‘한국형 포토라인’의 탄생이었다.
검찰과 언론, 때로는 피의자의 암묵적 동의 아래 운영돼온 ‘포토라인’이 25년 만에 존폐 기로에 섰다. 여러 차례 개선 요구는 있었지만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포토라인 패싱’이 계기가 됐다. 지난달 11일 양 전 대법원장은 서울중앙지검 청사 앞에 취재진이 마련한 ‘삼각형 포토라인’에 멈춰 서지 않고 그대로 들어갔다. 전직 대통령도 거쳐 간 포토라인을 무시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법조계 일부에서 포토라인에 서는 것은 ‘망신주기’ ‘현대판 멍석말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주요 피의자 소환 날짜를 언론에 공개하며 포토라인 ‘편의’를 봐주던 검찰도 한 발 뒤로 뺐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지난달 25일 기자간담회에서 “기자와 검사가 상부상조하는 포토라인을 폐지하는 것이 내 지론”이라며 “누구를 언제 부르는지 언론에 미리 알리지 말라고 검찰에 지시했다. 대검찰청에서 개선 방향을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이보다 앞서 문무일 검찰총창도 지난달 15일 법조언론인클럽과 대한변호사협회가 공동주최한 포토라인 토론회에 보낸 축사에서 “언론의 수사 과정 보도에 대한 인격권 침해 등 문제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바람직한 개선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했다.
검찰청 포토라인을 두고는 의견이 확연하게 갈린다. 법조계 쪽은 “여론은 물론 법관에게도 유죄 심증을 줄 수 있어 무죄 추정의 원칙에 반한다”며 대체로 ‘폐지’에 무게를 둔다. 특히 ‘피의사실 공표’에 해당한다는 비판이 힘을 얻고 있다. 반면 언론계 쪽은 “검찰 수사와 권력형 비리에 대한 감시,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이라는 순기능”을 강조하며 ‘개선’에 방점을 두고 있다. 검찰은 ‘인권 보호를 위한 수사공보준칙’을 통해 고위 공직자 등 공적 인물에 대한 포토라인 운영을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재벌 총수나 유력 정치인 등을 소환할 때 공개·비공개 여부를 자의적으로 정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와 관련해 대검찰청은 7일 “언론인과 언론학자, 법학자, 변호사 등이 참여하는 ‘포토라인 연구모임’을 구성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검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포토라인은 언론에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언론계에서 결정해줘야 하는 문제다. 관련 논의를 최대한 지원하고 거기서 나온 결과를 적극적으로 반영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임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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