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지난 1일 오후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이는 피해자가 피고인으로부터 위력에 의한 간음 피해를 당했다는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려운 정황이다.”
지난해 8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1심을 심리한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재판장 조병구)는 피해자 김지은씨의 몇몇 행동들을 나열하며 이렇게 밝혔다. △피해자가 안 전 지사에 성폭행 피해를 본 시점에 피해자가 안 전 지사가 좋아한다는 순두부 집을 찾으려 물색한 점 △와인바에 동행한 점 △안 전 지사와 가까이 숙소를 잡으려 했던 점 등이다. 모두 성폭행 피해 전후 보였던 김씨의 특정 행동들이다. 재판부는 이를 근거로 김씨가 ‘피해자답지 않다’고 결론 내고, ‘합의에 의한 관계’라고 주장한 안 전 지사 쪽 손을 들어줬다.
반면, 지난 1일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 형사12부(재판장 홍동기)는 이런 행동들을 하나하나 다시 열거하면서 “피해자라고 해서 다 같은 대처양상을 보이는 건 아니”라며 1심 판단을 뒤집었다. 검찰이 제기한 공소사실 10건 중 9건을 유죄라고 판단, 안 전 지사에 징역 3년 6개월의 중형을 선고했다. 그러면서 “특정하게 정형화한 성범죄 피해자의 반응만을 정상적인 태도라고 보는 편협한 관점을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항소심 재판부가 써 내려 간 144쪽 판결문을 통해 결론이 180도 바뀔 수 있었던 판단 근거들을 정리해 봤다.
■ 피고인신문·텔레그램 등 종합해 ‘순두부·와인바·미용실’ 행적 분석
피해자는 2017년 7월 안 전 지사의 출장지인 러시아에서 첫 간음 피해를 당했다. 안 전 지사 쪽 변호인들은 ‘성폭력 피해자로 보기 어렵다’는 정황 몇 가지를 제시했다. 피해자가 첫 번째 성폭력 피해를 본 뒤 안 전 지사가 좋아하는 순두부 식당을 물색하려 애썼고 그날 저녁 와인바에 동행해 담소를 나눴다는 점이 포함됐다. 귀국해서는 안 전 지사가 자주 이용한 미용실을 방문해 머리 손질을 받은 점 또한 문제 삼았다. 1심 재판부는 이러한 정황을 종합해 김씨의 진술의 신빙성이 없다고 봤다.
이에 대해 2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안 전 지사의 범행을 폭로하거나 업무를 중단하고 홀로 귀국하는 등 즉각적인 조처를 하지 않기로 한 이상, 수행 비서로서의 업무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먼저 고려했다. ‘와인바 동행’의 경우에도 “피고인의 지시로 와인바에 가게 된 것이지, 그와 다른 경위로 와인바에 가게 됐다고 전제하는 피고인 쪽 주장은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특히, 와인바를 물색하라는 안 전 지사의 지시를 받은 피해자가 직접 통역관에 와인바까지 통역과 안내를 부탁한 점, 또 안 전 지사와 함께 있는 상황이 불편해 통역관에 ‘계속 남아 있어 달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낸 점 등으로 미뤄 김씨가 안 전 지사와 와인바에 간 것은 “지시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 통역관 부부가 동행했다는 사실만을 ‘한 문장의 각주’로 판결문에서 짧게 처리한 1심과 대비된다.
이와 함께 문제가 됐던 ‘미용실 부분’은 재판과정에서 안 전 지사의 단골미용실이 아니라는 사실이 안 전 지사 본인의 진술로 새롭게 드러나기도 했다. 안 전 지사는 항소심 첫 피고인 신문에서 “오래된 팬클럽 회원이 점장인 곳으로, 단골미용실이 아니라 한 번 가본 것에 불과한 곳”이라는 취지로 진술했다.
“서울에 아는 미용실이 없던 차에, 해당 미용실이 있는 곳에서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머리를 했다”는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1심 재판부와 달리, 항소심 재판부는 신문을 진행해 해당 미용실이 피해자에 성폭행 가해자였던 안 전 지사를 떠올리게 할만한 ‘특별한’ 미용실은 아니었다고 본 것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지난해 8월 14일 서울 서부지법에서 열린 수행비서 성폭력 혐의 1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공동사진취재단.
■ “수행비서로서 당연한 업무”였던 안 전 지사 숙박 물색·예약
안 전 지사 쪽은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피해자가 수행 비서로서 안 전 지사의 해외·서울 등지의 숙박을 물색하고 예약했던 업무상 행적을 물고 늘어졌다. 세 번째 간음 피해가 일어난 2017년 9월 스위스 출장지의 경우,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안 전 지사의 방과 자신의 방을 가까운 거리로 조정한 점을 근거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없다”고도 했다. ‘김씨가 자기 숙소를 스스로 가까운 곳으로 잡은 데에는 다른 속셈이 있었을 것’이라는 취지로 피고인이 주장하자 재판부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항소심 과정에서 새로운 증거가 제출됐다. 출장 한 달 전 충청남도 경제통상실에서 작성한 ‘유엔(UN)인권이사회 지방정부 인권 패널 토의 참석 도지사 스위스 제네바 방문 활동계획’ 부록에는 “지사님과 수행비서는 가급적 같은 층(근거리 객실)에 배치”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해당 문건을 작성한 부서 공무원이 “통상적으로 수행비서는 지사의 근거리에서 보좌해야 한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안 전 지사와 가까운 거리에 숙소를 잡는 것은 수행비서였던 피해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는 점이 증거와 진술로 보강된 것이다. 재판부는 “수행 비서가 근거리에 있는 객실을 사용하면서 피고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수행비서의 업무상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가 주목한 ‘만실’ 문자도 2심은 달리 봤다. 2017년 8월 서울 ㄱ호텔에서 두 번째 간음 피해를 보기 전, 피해자는 운전비서에게 “방을 근처에 하나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거의 다 만실”이라고 문자를 보냈다. 1심은 “사실과 다르게 운전비서에게 호텔이 만실임을 이유로 다른 숙박 장소를 알아보도록 한 이유나 경위가 무엇인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안 전 지사와의 밀회를 위해 운전비서가 다른 호텔로 숙박하도록 유도했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2심에선 새로운 증거들이 추가로 제시됐다. 안 전 지사가 예정에 없이 ‘숙박 예약’을 지시한 사실이라든가, 피해자는 모두 여섯 곳의 호텔에 전화를 걸었던 점 또 주말이어서 객실이 거의 없었던데다 공무원 여비규정에 맞는 수준의 객실을 찾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 등이 관련 통화내역 등을 통해 입증됐다.
이에 항소심 재판부는 “수행인 1명은 안 전 지사와 동급인 호텔에서 잘 수 있었지만, 당일 숙소를 갑자기 잡은 데다 이용료까지 비싸 운전비서 객실까지 잡을 수 없었던 것”이라며 “‘그 급의 호텔은 운전비서까지 머물 수 있는 호텔이 아니어서 우회적으로 표현했다’는 피해자 진술이 납득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또 “ㄱ 호텔의 객실은 모두 332개 중 105개가 비어 다수의 공실이 있었다”는 1심 재판부 판단에 대해서도 “(이런 판단은) 객실 등급을 별도로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1심 재판부의 ‘빈틈’을 꼬집었다.
결국 1심에서 진행하지 않았던 안 전 지사에 대한 ‘피고인 신문’ 여기에 검찰이 새로 제출한 증거들이 보태졌고 재판부의 ‘성인지 감수성’이 더해진 것이 안 전 지사의 중형을 끌어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