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왼쪽 첫째)이 11일 아침 8시 서울대 행정관 앞에서 시설직 노동자 파업 지지 손팻말을 들고 오세정 신임총장을 기다리고 있다. 박성호씨 제공
서울대 시설관리직 노동자들이 파업 돌입 나흘 만인 11일 오후 2시부터 서울대 중앙도서관 난방을 재개했다. 파업 초기 일부 학생들과 함께 파업에 대해 비판하는 스탠스를 취했던 서울대 총학생회가 이날 새벽 입장을 바꿔 노조와 연대를 선언하고, 오세정 신임 총장도 노조 쪽 요구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히면서 나온 조처다.
서울대시설관리직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와 민주노총 서울일반노동조합 등은 이날 오후 “오후 4시에 있을 교섭에서 타결을 기대한다. 학생들이 파업을 지지하고 나선 것의 결과로 학교가 전향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에 노동조합도 학생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며 오후 2시부터 중앙도서관 난방을 재개한다고 밝혔다.
앞서 “도서관을 파업 대상에서 제외해줄 것을 요청하겠다”고 밝혔다가 노동자들의 처지를 외면한다고 비판받던 서울대 총학생회는 전날 열린 단과대 학생회장 운영위원회에서 이날 새벽 3시30분까지 이어진 밤샘 회의 끝에 노조와 연대하기로 입장을 바꿨다. 총학은 11일 성명서를 내어 “총학생회는 노조와 대학본부 간의 신속한 협상 타결을 이끌어내 쟁의의 장기화를 막고 학생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노조와 연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총학이 입장을 바꾼 건 ‘파업권 침해’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이 거세게 인데다 애초 예상과 달리 일부 보수언론과 경제지 등의 보도로 이번 사건이 ‘학습권과 노동권의 대립’ 구도로 짜였기 때문이다. 총학과 공대위 쪽의 설명을 종합하면, 총학은 애초 시설관리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내려고 했다. 하지만 도서관을 이용하는 학생들의 불만을 반영하기 위해 파업 직후인 지난 8일 “총학생회장단은 노조의 정당한 파업권을 존중한다”면서도 “다만, 도서관과 같이 학생들의 학업과 연구에 직결되는 시설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이를 위해 총학생회장단은 일반노조에 도서관을 파업 대상 시설에서 제외해줄 것을 다시 한 번 요청하겠다”는 성명을 냈다.
서울대 시설직 노동자들이 쓴 대자보에 ‘가정부가 보일러실을 점거하고 집주인 행세하려는 꼴’이라는 낙서가 달렸다. 박성호씨 제공.
서울대 일부 학생들은 노조 쪽에서 파업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손글씨로 쓴 대자보에 ‘가정부가 보일러실 점거하고 집주인 행세하려는 꼴’이라는 낙서를 쓰면서 노골적인 노조 혐오를 드러냈다. 서울대 인터넷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에도 한 재학생이 “학생들은 호구. 손해배상 무서워서 도서관 학생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이거 어떤 면에서 살벌한 세상”이라고 썼다. “변호사님들 저희 고시생들 모아서 단체소송으로 손배(손해배상) 안 되나요”라는 댓글도 달렸다. 서울대 총학 페이스북에도 재학생 ㄱ씨가 “그 어떠한 경우에도 학생들을 인질로 삼아 목적을 쟁취하려 해서는 안 된다”며 “추위 등을 이기고 도서관에서 묵묵히 공부하는 학생들은 무슨 죄입니까”라고 썼다.
그러자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선 비판이 쏟아졌다. 총학의 성명서에 대해서는 “정중한 말씨이지만 결국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침해하는 내용”(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페이스북 아이디 ‘Llamy**’를 쓰는 한 시민은 서울대 총학 페이스북에 “저는 ‘학생들에게 피해 안 끼치는 파업을 하라’는 식의 댓글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보고 놀랐다”며 “도서관을 병원·공항 등의 필수유지 업무와 같은 선상에 놓고 파업의 피해를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파업으로 타격을 받아 공공의 질서가 타격을 입을만한 업종들은 현행 노조법에서 필수유지 업무로 정해두어 파업의 가능한 정도를 정해 두었다”라고 비판했다. ‘RanchN**’도 “내 이익을 위해 기꺼이 다른 사람을 짓밟을 수 있는가에 대한 서울대 총학생회의 대답 잘 들었습니다”라고 썼다. ‘David Jeo**’은 “총학인가 학생복지센터인가. 파업권을 존중하는 것이 뭔지 모르는 건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했던가. 이 말대로라면 조국의 미래는 노동권이 존중되지 않는 암담한 사회겠구나”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자유한국당에서 “자신들의 금전적 따스함을 위해 같은 대학에 몸담고 있는 학생들의 따스함을 빼앗아가는 ‘볼모 파업’은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대변인 논평을 내고, 보수언론에서 민주노총에 대한 비판에 열을 올린 점도 총학을 되레 궁지로 몰아넣었다. 공대위 관계자는 “학생회 간부들도 (자유한국당 등에) 그렇게 이용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나왔다”며 “단과대 학생회장 운영위원회 등 총학 내부에는 다양한 성향의 학생들이 섞여 있다. 자유한국당과 도매금으로 가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총학은 특히 해당 이슈가 ‘학습권과 노동권의 대립’으로 비치면서 오히려 노조에 부담을 줘 문제 해결이 늦어질 것으로 봤다. 이에 단과대 학생회장 운영위원회에 소속된 15개 단과대와 회장단 2명 가운데 밤샘 회의에 참석한 총학생회장과 부총학생회장을 포함한 10명의 학생대표는 만장일치로 서울대 총학이 노조 파업에 연대하기로 의결하게 됐다.
앞서 지난해 정규직으로 전환된 서울대 시설관리직 노동자들은 서울대에 정액 급식비와 복지 포인트 40만원, 명절휴가비 1회에 40만원을 요구하며 단체교섭을 시작했다. 교직원 행정사무직은 복지 포인트로 100만원, 명절휴가비는 월 기본급의 60%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대는 명절휴가비는 줄 수 없고, 정액 급식비 10만원이 포함된 연 30만원의 복지 포인트를 주겠다고 했다. 이에 노조는 지난 8일 파업을 선언하고 △단체교섭에 성실하게 임할 것 △중소기업 제조업 시중노임 단가 100% 적용 △복지 부분을 서울대학교 구성원 간 취업규칙에 맞게 차별 없이 적용할 것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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