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21년에 걸쳐서 조선·중국·러시아 국경지대에서는 독립군들의 무장투쟁이 전에 없던 규모로 고조되기 시작했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승전 뒤 기념사진.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제공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독립운동가라면 마땅히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갖고 있어야 했다. “반드시 독립이 된다! 독립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내면의 신념이 있어야 했다. 그래야만 운동 과정에서 겪게 되는 온갖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었다. 3·1혁명에 참가한 이들도 그랬다. 수백만명의 군중이 평화적·비평화적 방법을 망라하여 식민지 통치 권력의 전복을 위해서 행동에 나선 시기였다. 그랬던 만큼 다양한 독립운동론이 분출해 나왔다. 급진론, 완진론, 혈전론, 의열투쟁론, 실력양성론, 대외선전론, 무장투쟁론 등으로 불리는 여러 구상과 계획이 제기됐다. 그러나 이 노선들이 현실 속에서 동일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된 역할을 했던 것들이 있었다.
3·1혁명 발발 당시의 주된 운동론은 외교독립론이었다. 이 운동론은 몇 개의 골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핵심은 국제회의에 한국 대표단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은 앞다투어 대표 파견을 꾀했다. 상해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보냈고, 러시아 대한국민의회는 윤해와 고창일을, 재미 대한인국민회는 이승만과 정한경을 각각 파견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동일한 행동 양상이 나타났다. 그만큼 이 운동론은 당시 조건 속에서는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 주목했다. 미국·일본 사이에 모순이 격화하고 있는데, 그것이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변모시킬 가능성을 부여한다고 평가했다. 일본과 갈등을 벌이는 강대국과 제휴하여 일본의 국제적인 고립이나 후퇴를 가져올 수 있는 공동 행동을 모색한다는 복안이었다.
외교독립론에는 또 하나의 골자가 있었다. 대표단의 외교적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한다는 전략이었다. 만세시위운동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대중시위운동의 전략적 지위는 1918년 말~1919년 초에 북간도 장동에서 열린 비밀회의 참석자들의 논의에서 잘 드러난다.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를 파견하되, “민족 전체가 떠들고 일어나 시위운동을 격렬하게 하여, 대표의 뒤를 성원하여야 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만세시위운동은 한국 대표단의 외교 교섭력을 강화하기 위한 압력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상해임시정부 수립도 그랬다. 1919년 4월에 상해에서 서둘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에게 ‘국가’ 대표라는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설령 임시정부일지언정 한 국가의 대표라면 국제회의 참가 가능성과 영향력이 증대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한국 대표 김규식과 그 협력자들. 앞줄 오른쪽 끝이 김규식. 한겨레 자료사진
요컨대 3·1혁명기 외교독립론은 세 개의 행동계획이 모인 것이었다. 첫째, 국제회의에 대한 대표단 파견, 둘째, 대규모 만세시위운동, 셋째, 임시정부 수립안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주된 역할을 하는 것은 대표단 파견이고, 다른 두 가지는 그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간주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외교독립론은 머지않아 벽에 부딪혔다. 파리강화회의가 한국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1919년 6월 종료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물론 영향력이 전혀 없어진 것은 아니다. 뒤이어 개최될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 독립 승인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예컨대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8월 국제연맹 파견 대표단을 선정했다. 김규식, 서재필, 이승만이 그들이다. 쟁쟁한 민족주의자들이 선임된 것으로 보아, 임시정부 측의 기대감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임시정부는 대표단의 외교 교섭력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예컨대 일본의 침략상과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선전하기 위해 <한일관계사료집>을 편찬했다. 국제 여론에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국제연맹에 제출할 안건도 작성했다. 유럽과 미국의 여러 도시에 선전 사무소를 설립하고자 노력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하지만 외교독립론의 거듭된 실패는 독립운동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게끔 이끌었다. 그 선두에 통합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인 이동휘가 섰다. 그는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이동휘는 미국과 국제연맹에 희망을 거는 데 반대하고 그 대신에 ‘광복전쟁론’을 제시했다. 광복전쟁론의 논리를 잘 보여주는 글이 있다. 임시정부가 펴낸 <독립신문>(1920년 3월23일자)의 사설 ‘세계대전이 오리라’가 그것이다. 한국이 독립하려면 일본 국가 권력을 타도해야 하는데, 저 강대한 일본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는가? 세계대전이 그 해답이었다. 머지않아 제국주의 강대국 사이에 전쟁이 불가피하게 발발할 수밖에 없으므로, 일본에 적대적인 강대국과 제휴하여 공동 투쟁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동휘 국무총리 시기의 임시정부는 정책 전환을 단행했다. 1919년 말~1920년 초였다. 상해임시정부는 광복전쟁론을 표방하고 나섰다. 만주 한인 사회에 징병령을 발포하고, 연해주, 북간도, 서간도에 동로(東路), 북로(北路), 서로(西路)라고 부르는 3대 군관구를 설정했다. 각 군관구의 사령관도 임명했다. 광복전쟁론에 입각해서 시정 방침을 펴나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1920~21년에 걸쳐서 조선·중국·러시아 국경지대에서는 독립군들의 무장투쟁이 전에 없던 규모로 고조되기 시작했다. 저 유명한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가 다 이때 일어난 사건들이다.
이동휘 국무총리는 대외관계에도 변화를 꾀했다. 미국과 국제연맹 대신에 소비에트 러시아에 주목했다. “만국의 노동자와 피억압 민족은 단결하라!” 코민테른이 표방한 슬로건이었다. 서구의 노동운동 세력과 비서구의 민족해방운동 세력이 제휴하여 제국주의 세계체제를 깨트리자는 제안이었다. 이동휘 국무총리가 구상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시정 방침과 딱 들어맞는 방안이었다. 이동휘는 두 개의 대표단을 소비에트 러시아에 파견했다. 한인사회당 대표단(박진순, 박애, 이한영)과 상해임시정부의 전권대사(한형권)가 그들이다. 당 대표와 정부 대표를 둘 다 파견한 셈이다. 전자는 코민테른을 상대로, 후자는 레닌 정부를 상대로 하여 외교활동에 임했다. 이동휘 정부의 러시아 외교는 대성공을 거뒀다. 러시아 정부가 한국 혁명계에 200만 금화 루블을 제공하기로 합의하고, 그중 60만 루블을 실제로 지불한 사실은 그 대표적인 성과로 평가된다. 금화 60만 루블은 오늘날 화폐 구매력으로는 대략 765억원쯤 되는 액수였다. 혁명과 내전의 와중에서 고통을 겪던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가 한국 혁명의 승리를 돕기 위하여 거액의 지원금을 쾌척했던 것이다. 이는 식민지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지원하는 사회주의자들의 국제주의 정신의 발로였고, 또한 이동휘 정부의 독립전쟁론이 거둔 한 성과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광복전쟁론은 뒷날 사회주의 수용의 한 통로가 됐다. 그것은 한국 독립을 열렬히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게 하는 촉매제 구실을 했다.
외교독립론과 광복전쟁론은 3·1혁명을 이끌었던 양대 독립운동 노선이었다. 1919~21년에 표출된 민중의 혁명적 열정은 이 두 노선에 의해 인도됐다. 이 노선들은 비단 3·1혁명기에만 출현한 것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전 시기에 걸쳐서 독립운동이 고조되는 시기에는 어느 때든지 되풀이 나타났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두 개의 독립운동 노선은 한국 독립운동사를 대표하는 양대 전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