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 김알렉산드라(1885~1918)와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을 결성했으며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1873~1935).
<편집자 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 숨 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1919년 2월24일 로서아/최하얀 기자】
근자에 로서아(러시아) 연해주에서도 윤해(31)·고창일(27)씨가 불란서 파리강화회의로 출발하였다는 바는 이미 보도한바, 본래 파송자로 검토했던 이는 연해주 지방 수령급인 이동휘(46)·문창범(49)씨였다고 한다. 노령 한인들을 대표하는 전로한족중앙총회에서 논의해보니, 열강들이 일본과 전쟁을 하면서까지 조선의 독립을 관철시키겠는가란 근심이 무거워 파송 대표의 격을 낮추었다는 후문이다.
거명된 이동휘씨는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작년에 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을 결성한 인물이다. 동포들에게는 사회주의네 공산주의네 생소할 터이나,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해 진작에 세계대전 연합국에서 탈퇴한 로서아에서는 본류라고 한다. 로서아에서는 2년 전 10월 공산혁명을 하여 노동자·농민이 권력을 쥐는 소비에트 정부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혁명에 반대하는 불란서·영국·미국과 원동 지방을 호시탐탐 노리는 일본이 수만 군대를 보내 적기를 흔들어대는 혁명군과 싸우고 있으니, 이씨 안목에는 사회주의 하는 것이 곧 반일이었다. 더욱이 연해주 한인들 간에도 ‘계급 차별’ 정서가 있다고 한다. 로서아로 진작 귀화해 토지와 재산을 받은 한인(원호)들은, 소작이나 일용 노동을 하여 먹고사는 한인(여호)에게는 항일을 논하는 회합(1917년 5월 전로한족회의)에서도 의결권을 주지 않았다니, ‘소비에트 만세, 볼셰비키 혁명 만세’ 목소리가 절로 커진 것이다.
한인사회당은 작년 5월 ‘소비에트 로서아와 연대, 반일·반제 사회주의’를 강령으로 내세우고 이씨를 위원장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작년에 사망한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허발표(하바로브스크) 소비에트 외무위원도 발 벗고 나서 도왔는데, 기실 김씨가 없었으면 창당은 쉽지 않았을 터다. 로서아에서 태어난 김씨는 전에는 우랄 지방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벌목공들을 조직해 노동자 동맹을 결성하는 등 활약하였다. 이씨가 독일의 밀정 혐의로 구속됐을 때 석방 운동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한인사회당은 작년 8월 적위군으로서 전투하다 로서아 반혁명파(백위파)에 처참히 패퇴하였다고 한다. 천행으로 이씨 등은 생존하였지만, 김씨는 백위파에 잡혀 작년 9월16일 허발표 아무르강변에서 33살의 나이에 총살되었다. 김씨가 총살 직전 외친 유언이 원동의 많은 이들을 울렸다고 하니 동포들에게도 소개한다. “지금 내가 걸은 열세걸음은 조선의 열세개 도이다. 조선의 13도 젊은이들이여,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성취하여라. 여러분 모두는 우리의 후예가 조선을 해방시키고 사회주의를 어떻게 건설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조선독립 만세! 소비에트 만세! 세계혁명 만세!”
△참고문헌
반병률,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의 생애와 활동’ <윤병석교수화갑기념 한국근대사논총>(지식산업사·1990)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21(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