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친일로 변절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33인 민족대표 중 친일한 이는 최린·박희도·정춘수 셋뿐이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 체포된 최린(맨 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해 한 유명 역사강사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인 태화관에서 낮술을 먹었으며, 대부분 1920년대에 친일로 돌아섰다’며 민족대표 33인을 비판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결국 법정까지 간 이 발언을 전해 들으며 진위와 명예훼손을 따지기에 앞서 한편에서 민족대표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사실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역사학계도 상당 기간 민족대표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보여왔다.
3·1운동 70주년이 되던 1989년, 역사학계는 33인을 ‘민족대표’가 아니라고 선언한 바 있다. 탑골공원이 아닌 태화관을 선택하고, 독립선언식을 마친 뒤 경찰에 자진해서 끌려감으로써 스스로 운동의 지도권을 포기했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지적된 33인의 한계는 첫째, 일본과 미국,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등 타협적이고 외세 의존적인 독립방법론에 입각해 있었고 둘째, 외세에 의존하면서도 국제정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셋째, 민중에 대해 심한 불신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김성보, ‘3·1운동에서 33인은 ‘민족대표’가 아니다’, <역사비평> 1989년 겨울호). 그들이 제시한 비폭력 노선 역시 부르주아 계급의 사회경제적 취약성과 민중 불신에서 비롯된 기회주의적 사고와 자세를 보여주는 것으로 비판받았다(이윤상 외, ‘3·1운동의 전개양상’, <3·1민족해방운동 연구>, 청년사, 1989).
그로부터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불거진 민족대표 논란을 접하며 든 생각은, 해당 발언을 한 역사강사가 ‘최근 역사학계의 연구 흐름을 모르는구나’라는 것이었다. 독립운동사 연구가 진전되면서 민족대표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선도 점점 무뎌졌다. 그들이 엄혹한 일제의 무단통치하임에도 1919년 3월1일 서울만이 아니라 평양, 진남포, 선천, 의주, 원산에서 만세시위를 사전에 주도한 행위에 대해 종전보다 더 높은 평가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첫날 앞서 언급한 도시에 안주를 보태 모두 7개 도시에서 일어난 만세시위가 다음날부터 인근 지역에 확산되면서 3·1운동의 전국화에 토대를 놓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3월1일의 조직적 만세시위가 전국적 시위를 촉발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물론 1989년의 시점에도 ‘33인이 없었다면 3·1운동은 일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33인이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33인 개개인이 1910년대의 무단정치 아래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용기있는 결단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며 3월1일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 기획에 있어 이들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민중사관의 시각이 강했던 1989년에는 촉발자로서 33인의 역할보다 태화관에서의 독립선언식과 투항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들이 운동의 지도권을 포기한 결과 지도권이 민중에게 넘어간 사실에 더 주목했다. 이와 달리 최근엔 33인의 민족대표가 만세시위를 기획했던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평가를 받고 있다.
1996년 2월 충북 청주 삼일공원에서 친일로 변절한 민족대표 정춘수 목사의 동상이 철거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역사학계의 영향 탓인지 대중들도 민족대표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민족대표가 대부분 친일파로 변절했다’는 오해가 자리잡고 있다. 33인 민족대표 중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최린, 박희도, 정춘수 세 사람뿐이다. 민족대표 중에 친일파가 많다는 오해는 독립시위를 주도적으로 준비한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 기독교 지도자 박희도의 변절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주모자인 두 사람의 친일행위를 33인 민족대표 전체의 변절로 받아들인 것이다. ‘3·1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최남선의 친일도 ‘민족대표=친일파’라는 오해를 키우는 데 영향을 미쳤다. 민족대표의 사실상 총지휘자였던 손병희는 1919년 3월1일 체포된 뒤 옥고를 치르다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결국 1922년 5월19일 세상을 떠났다. 민족대표의 한 사람인 양한묵은 1919년 5월26일 옥사했다. 하지만 우리는 두 사람의 희생을 기억하지 않는다.
3·1운동에서 민족대표의 역할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3·1운동 이래 오늘날까지 이어진 저항시위에 상징적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학농민전쟁 하면 바로 전봉준이 떠오른다. 그런데 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4·19혁명, 5·18광주항쟁, 6월항쟁, 촛불시위 하면 곧바로 떠올릴 수 있는 지도자가 없다. 오히려 희생자의 이름이 떠오른다. 3·1운동은 유관순, 4·19혁명은 김주열, 6월항쟁은 박종철·이한열이 생각난다. 3·1운동 이래 상징적 지도부를 갖진 못했지만 한국인들은 스스로 거리로 나가 독립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그 희생을 기렸다. 그래서 3·1운동 하면 민족대표가 아니라 곧바로 유관순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지도부 없는 항쟁의 역사와 함께 분단 현실도 영향을 끼쳤다. 1919년 3월1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7개 도시 중 서울을 제외한 6개 도시가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천도교·기독교·불교 지도자들이 연대해 독립선언식을 준비했다.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많이 살던 북쪽에서도 첫날 만세시위를 종교 지도자들이 종교별로 혹은 연대해 준비했다. 이날 북쪽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는 안주를 제외하고 모두 민족대표들이 준비한 것이었다. 가령, 원산의 경우 민족대표인 정춘수는 3월1일 아침까지 만세시위를 진두지휘한 뒤 서울로 떠났다. 의주에서는 민족대표인 유여대 목사가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지 않고 직접 의주의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선천에서는 민족대표인 양전백이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33인 민족대표 중에는 15명이 북쪽 출신이었다. 하지만 분단 탓에 1919년 3월1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도시 중 서울을 제외한 6곳의 역사는 서서히 잊혀갔다. 남북이 분단되지 않아 3월1일마다 기념식을 같이 했다면 서울만이 아니라 6개 도시의 만세시위도 함께 되새겼을 것이다. 당연한 귀결로 북쪽의 만세시위를 끌어낸 민족대표의 역할에도 주목하게 되었을 것이다. 남북분단은 이렇게 3·1운동의 기억과 기념도 갈라놓았다.
1919년 3월1일로부터 100년이 지난 2019년, 민족대표는 3월1일 독립시위의 기획자로 재조명받고 있다.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지도자 15명, 기독교 지도자 16명, 불교 지도자 2명으로 구성되었다. 천도교·감리교·장로교·불교 그 어떤 종교도 홀로 독립투쟁에 뛰어들기보다는 연대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종교 연대로 꾸려진 민족대표들은 1919년 2월28일 독립선언서를 전국에 배포했다. 3월1일 그들은 독립선언식을 하고 경찰에 연락해 경무총감부로 끌려갔다. 그날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도시는 7곳이었다. 독립선언서만 배포된 지역은 18곳에 이른다. 대부분 북쪽이었지만 익산, 마산, 전주 등 남쪽에서도 발견되었다. 당일 서울에는 2월28일 천도교에서 제작한 〈조선독립신문〉 1호가 뿌려졌다. 거기에는 “오후 2시 조선독립선언서를 경성 태화관 내에서 발표하였으며 이후 동 대표 여러분은 종로경찰서에 끌려갔다고 한다”고 적혀 있었다.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경찰에 끌려가는 것이 3월1일 이전에 사전 기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3월1일 이후 민족대표들은 비록 감옥에 갇혔지만, 그들이 발표했던 ‘3·1독립선언서’는 날마다 등사되어 전국에서 두달이 넘게 일어난 만세시위와 함께했다.
김정인 춘천교대(사회과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