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서울 명동에 위치한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18층 대회의실에서 ‘가습기살균제참사 피해가정 실태조사 결과 발표회’가 열렸다. 발표회 입구에 아이가 고통스러워하며 가습기 살균제를 마시는 모습의 포스터가 붙여 있다. 이정규 기자.
4살 때 가습기 살균제 노출 피해를 입고 10년이 지난 ㄱ군. ㄱ군은 지금도 숨이 차 음악 시간에 피리를 불지 못한다.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뛰어놀기도 어렵다. 친구들과 함께 가는 수련회도 건강 문제로 가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살균제를 샀던 엄마는 스스로를 죄인이라 자책한다. 폐 질환이 생겨 숨이 가빠오는 아이를 볼수록 면목이 없다. 독성물질을 살균제에 넣은 기업의 잘못이 분명한 건데, 엄마는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친구 관계가 서먹하다는 아이에게 엄마는 공부하라는 말 대신 “건강만 해. 스트레스 받지 마”라는 말을 건넸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이은영(42)씨는 기업과 정부에게 대책을 요구하며 현실의 벽을 마주했다. ㄱ군이 2011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6살 때인 당시만 해도 폐 질환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키가 커가고 폐가 자라날수록 ㄱ군의 폐 기능이 점점 떨어졌다. 결국 ㄱ군은 작년이 되어서야 폐 질환을 인정받았다. 그 사실을 안 ㄱ군은 엄마에게 “엄마는요?”라고 물었다. 함께 피해를 입은 엄마의 질환 인정을 걱정한 것이다. 이씨 역시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지만 피해자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너무 억울하고 분하니까 유서를 잔뜩 복사해서 높은 빌딩 올라가서 가슴에 품고 뛰어내리면... 사람들이 저 사람이 피해자라고 봐주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이씨가 울먹이며 말했다.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14일 ‘가습기살균제참사 피해가정 실태조사 결과 발표회’를 열고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만성적 울분 상태에서 사회적 고립이 우려된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부터 80여일 가량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로 신청했거나 판정된 4127가구(총 5253명) 가운데 100가구(성인 127명, 아동 73명)를 임의로 뽑아 한국역학회가 다학제 연구(어떤 하나의 연구주제에 대해서 두 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접근을 취하는 학문 분야의 연구자들이 제휴하여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것)를 수행한 결과, 성인 피해자들은 66.6%가 만성적 울분 상태가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가운데 절반인 33.3%는 중증도 이상의 심각한 울분 상태로 외상후 울분장애(PTED)를 겪었다. 일반인과 견주어 약 2.27배 높은 수치다. 외상후 울분장애는 부정적인 사건을 경험한 뒤 정신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만성적 반응장애로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이를 불공정하게 여기면서 절망에 사로잡히게 되는 질환이다.
외상후 울분 장애를 겪은 이들은 현실이 공정하다는 믿음이 깨지면서 지속해서 울분을 호소한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처럼, 사건·사고의 피해자가 됐지만 정부가 요구를 묵살할 때 증상은 더 악화한다. 울분이 만성화하면 소득 활동이 불가능한 심리상태에 이른다. 심각한 경우 공격성이 표출되며 폭력을 휘두르거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실제로 가습기 살균제 성인 피해자의 경우, 자살시도율이 11%로 일반인보다 3.4배쯤 더 높았다. 이들은 10명 이상 이웃과 인사하고 지낸다는 응답 비율이 일반인에 견줘 1.4배 낮기도 했다.
이들이 울분에 사로잡히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정부로부터 피해자로 인정받기 위한 ‘인정 투쟁’ 때문이었다. 정부는 가습기 살균제 사용과 폐 질환의 인과관계 정도에 따라 1단계에서 4단계까지 폐 질환을 분류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을 선별했다. 사건 발생 당시 정부는 1~2단계의 폐 질환 환자를 피해자로 인정했으나, 3~4단계의 폐 질환을 겪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8년 동안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대책위에서 활동해온 최주환(65)씨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처음부터 피해 단계를 나누는 게 아니었다. 가습기 살균제를 쓴 게 확실하고 아픈 게 확실하면 피해자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를 쓰다 세상을 뜬 내 아내도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 가능성이 낮다는 3단계 판정을 받았다”며 “억울한 마음에 내가 사는 아파트 15층에서 밑을 보면서 여기서 떨어지면 몇 초안에 죽는데… 그런 생각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최주환씨가 2007년에 자신이 사놓은 가습기 살균제를 버리지 못하고 보관해 놓았다며 보내준 사진. 최씨는 억울함에 못 이겨 가습기 살균제에 칼질을 했다고 밝혔다. 최주환씨 제공
외상후 울분장애로 분류된 한 40대 여성은 가습기 살균제로 태아와 한 명의 아이를 잃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했고, 다른 정부나 언론에 말했지만 정부가 피해자한테 자꾸 증명하라고 그러면 저는 가습기를 다시 흡입할 수밖에 없어요. 다시 흡입해서 다시 임신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아픈 애를 낳고 부검할 수밖에 없어요. 도대체 저한테 뭘 어떤 식으로 증명하라는 건지…. 이제 끝까지 온 것 같아요.” 그는 조사 과정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폐 이식을 받으며 또 다른 외상후울분장애를 겪는 피해자 50대 여성도 있었다. “내가 환경부에 전화도 많이 했어요. ‘기다려 보세요. 아니에요. 오해에요’ 그 단답형의 답이 오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들은 것은 없으니깐. 그리고 많이 지쳤어요, 이제, 많이 지쳤어요…. 나는 이 나라 국민이 아닌 것 같아. 그냥 한 조각의 뭐라 그럴까 종잇조각이나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되는 거 같아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병원에서 진단받아 자기 보고한 질환은 폐 질환을 제외하고도 △태아 피해(사산, 유산, 선천성 기형아) △독성간염 △자폐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비염, 결막염 등 안과 질환 △고혈압, 고지혈증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정부가 2020년까지 가습기 살균제 피해 대상을 확대하여 구제급여를 해주기로 한 피해는 △1~2단계의 폐 질환 △천식 △아동 간질성 폐 질환 △태아 피해 △독성간염 등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신체건강 문제만이 아니라 정신 건강 피해도 심각하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중증도 이상의 우울 고위험군, 자살 고위험군으로 파악됐다. 이들이 진단받은 정신질환은 수면 장애가 18.9%, 우울증이 13.4%, 불안 장애는 7.9%였다.
14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정 실태조사 결과 발표회’를 앞두고 연구진들이 묵념하고 있다. 이정규 기자.
연구를 책임진 김동현 한림대 의대 교수는 이날 열린 발표회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을 위해) 자살예방 대책과 전반적인 건강조사, 가정해체 조사 등이 필요하다”며 “그동안 모든 것이 지연됐다. 환자의 건강피해 측정, 가해 기업 책임, 피해자 보상이 미뤄졌다. 피해자들이 2차 피해를 호소하게 되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특조위는 피해자 100가구의 경제적 피해 비용을 125억원에서 539억원으로 추정했다. 황정원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지원소위원장은 “이번 연구에서 최초로 시도한 경제적 피해 비용만 봐도 현재 정부가 지원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며 “억울하게 피해 입은 당사자가 잃어버린 개인 삶에 대한 보상은커녕, 직접 지출한 비용조차 보전하지 못하는 현실이 납득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울분 연구를 수행한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이번 연구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에게 사회가 개입해 도움을 줄 여지가 확인됐다. 이분들이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회복할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며 “피해자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낙인과 같은 추가 피해를 막아야 한다. 피해 보상으로 좁혀진 물신주의적인 좁은 프레임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특조위는 아울러 현재 폐 관련 질환만 인정하는 정부의 판단을 넘어 더 많은 범위의 피해를 인정하는 ‘가습기살균제증후군(HDS)’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습기살균제증후군은 피해자들에게 폐 이외의 질병이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신체 모든 부위에 대한 질병을 피해에 포함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단기 피해만이 아닌 중장기 피해와 2차 피해를 파악하고, 신체 피해를 넘어 피해자들의 정신적·사회적 고립으로 인한 피해 전반을 드러내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날 발표회에 참여한 ㄱ군의 어머니 이은영씨는 울음을 참으며 말을 이어갔다. “학교 생활하며 숨이 차 힘들어했던 아이가 집에 들어왔어요. ‘나를 너무 힘들고 아프게 한 에스케이(SK)와 애경을 정말 폭파해버리고 싶어.’ 애가 울먹거리고 하소연했어요. 가습기살균제증후군이라는 개념으로 피해자의 정신 피해까지 인정하고 정부가 지원해주어야 해요.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재난으로 정부가 바라봐주었으면 해요.”
이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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