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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임시정부 100돌] 3·1운동 계기 ‘임정 급조’?…망국 뒤 ‘10년의 각고’ 있었다

등록 2019-03-18 07:15수정 2019-03-18 08:27

김정인 기고…망각된 역사, 임시정부 수립운동

1910년 출범한 ‘대한인국민회’는 미주지역 한인을 대표하는 정부기관 구실을 했다. 당시 중앙총회 임원들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제공
1910년 출범한 ‘대한인국민회’는 미주지역 한인을 대표하는 정부기관 구실을 했다. 당시 중앙총회 임원들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제공

흔히들 3·1운동의 결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가 탄생했다고 얘기한다. 여기서 말하는 임시정부란 1919년 4월11일 상하이에서 탄생한 임정을 가리킨다. 정부는 이날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로 기린다. 3·1운동은 1919년 3월1일 발발해 두달 넘게 계속됐다. 4월11일이면 만세시위가 절정이던 4월 초순을 지나 중순에 막 접어든 시점이다. 3·1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한 셈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이 3·1운동의 결과라면 한국인은 3·1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임시정부를 수립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일까. 세계사에서는 나라가 망한 직후부터 나라 밖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거나 수립운동을 벌이는 사례를 흔히 접한다. 한국인 역시 망국과 동시에 국외에서 임시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대 내내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미국,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이어졌다. 더욱이 3·1운동 발발 나흘 전인 1919년 2월25일, 러시아 연해주에서 임시정부를 표방한 대한국민의회가 조직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이 3·1운동의 결과로만 해석되면서 망국 이후 간단없이 이어졌던 임시정부 수립운동의 역사가 잊히고 말았다.

■망국과 동시에 일어난 임시정부 수립운동

임시정부 수립운동은 대한제국이 망할 무렵부터 일어났다. 1910년 5월 미국에서 한인의 자치결사체인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었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기관지인 <신한민보>는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직전인 1910년 7월6일자 사설에서 ‘현 정부가 일본에 투항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즉,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하여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임을 천명했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후인 1910년 9월21일자 사설에서는 ‘우리 손으로 자치하는 법률을 제정하며 공법에 상당한 가(假)정부를 설치함이 목하의 급무’라며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여기서 ‘공법에 상당한 가정부’란 국제법상 인정받은 임시정부를 뜻한다.

<신한민보> 1911년 4월5일자에서는 주필 박용만이 무형정부론을 주장했다. 국외에 살고 있는 한인이 무형의 정부로 결집해 헌법을 채택하고 지역별 행정기관을 갖추는 동시에 개인에게는 의무와 권리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무형국가론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해 이를 자치제와 대의제에 기반을 둔 무형정부로 확대·개편하는 방안이 제기되었다. 마침내 1911년 8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국외 한인을 대표하는 자치기관임을 내세우며 출범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일어난 임시정부 수립운동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러시아 연해주 한인들도 임시정부 수립운동을 펼쳤다. 한인 결사체인 ‘권업회’는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이 패전할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했다. 하지만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려는 러시아 정부의 탄압으로 좌절됐다. 중국에서도 1차 세계대전을 독립의 기회로 본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했다. 1915년 3월 베이징에서 결성된 신한혁명당은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면 중국과 함께 일본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에 대비해 고종을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세우자는 계획도 마련했다. 하지만 국내에 파견한 밀사가 체포되고 독일이 패전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1917년 7월 상하이에서는 박은식, 신채호, 김규식, 조소앙 등 14명의 독립운동가가 국외 한인의 대표자회의를 열어 공화정체의 임시정부를 건설하자는 주장을 담은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3·1운동 전후 시기의 임시정부 수립운동

1차 세계대전은 일본을 비롯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종전 무렵 민족자결주의가 부상하면서 다시 독립의 희망이 싹텄다. 임시정부 수립운동도 본격화되었다. 먼저 1917년 12월 연해주에서 결성된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임시정부 수립운동에 나섰다. 3·1운동을 나흘 앞둔 1919년 2월25일 전로한족회중앙총회 상설위원 15명이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했다. 대한국민의회는 ‘의회’라 불렀지만 실제로는 행정·사법 기능 등 삼권을 하나에 담아낸 조직체로 대통령제를 지향했다.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이 한창이던 3월17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공식 출범했다.

국내에서는 3·1운동 발발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가시화되었다. 3·1운동을 주도한 천도교가 1919년 3월3일자로 발행한 <조선독립신문> 제2호는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임시대통령을 뽑는다는 소식을 전했다. 종교계와 유림이 함께 한성정부 수립운동에 나선 것도 이즈음이다. 같은 달 17일 민주공화정 수립의 절차와 방법을 논의했다. 4월2일에는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회의를 열어 한성정부 수립을 선포하려 했으나 성원 부족으로 실패했다. 4월23일 다시 13도 대표가 모여 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국민대회를 열 계획이었으나 소규모 시위를 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4월17일에는 평북 선천·의주·철산 등에 ‘신한민국정부선언서’가 뿌려졌다. 신한민국은 국내와 간도·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추진한 임시정부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일어난 한성정부 수립운동과 결합해 하나의 임시정부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양자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전단상으로만 존재하는 임시정부도 있었다. 이를 ‘전단정부’라 부른다. 4월10일 서울에는 조선민국임시정부 명의의 ‘조선민국임시정부조직포고문’ ‘조선민국임시정부창립장정’ 등이 살포되었다. 임시대한공화정부안, 대한민간정부안, 고려임시정부안 등도 일종의 전단정부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공화제 정부를 지향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상하이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이 준비되었다. 1919년 2월 말 서울에서 3·1운동을 준비하던 천도교와 기독교 지도자들이 현순 목사를 상하이로 보냈다. 현순은 3월1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는 천도교에서 준 2천원으로 프랑스 조계 안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차렸다. 3·1운동 소식이 알려지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곳을 찾았고 독립임시사무소는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는 기구 역할을 했다.

1919년 3월26일과 27일에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모임이 열렸다. 입장은 갈렸다. 이른 시일에 최고기관을 수립하자는 쪽과 국내 민족대표 33인의 뜻을 기다려 결정하자는 쪽이 맞섰다. 결국 다수가 조속한 임시정부 수립에 동의하면서 본격적인 준비가 진행되었다. 4월10일 오후 10시, 29명의 독립운동가가 모여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정부 수립에 나섰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대한’은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다는 뜻을, ‘민국’은 1912년 수립한 ‘중화민국’에서 ‘민국’이 의미하는 것처럼 공화제 국가임을 분명히 한다는 결의를 담고 있었다. 임시정부 수립 절차는 자정을 넘겨 이튿날인 4월11일 오전 10시까지 이어졌다. 임시의정원이 ‘대한민국임시헌장’을 반포하면서 마침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19년 9월6일에는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통합하면서 한성정부의 내각 명단을 수용한 통합 임시정부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출범했다. 10여년 동안 이어져온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마침내 결실을 본 것이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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