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서울 서초구 서울가정법원에서 젠더법연구회 주최로 <미투, 그 이후 - 법정으로 온 성범죄 사건의 쟁점들> 심포지엄이 열렸다. 사진 젠더법연구회 제공.
판사 10명 중 9명은 성범죄 재판에서 피해자의 평소 품행이나 평판을 언급하는 등의 부적절한 신문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판사 770명으로 구성된 법원 젠더법연구회(회장 노정희 대법관)가 지난 1~2월 법조인 386명(판사 241명, 검사 30명, 피고인 변호인 79명, 피해자 변호사 36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설문에 응답한 판사의 90%가 “검사 또는 변호사가 성범죄 재판의 증인신문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부적절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한 적 있다”고 답했다. 특히 여성 법관 가운데 그렇다고 답한 경우는 97.2%(70명)에 달했다.
설문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설문조사에 참여한 판사들은 증인신문 과정에서 흔히 보이는 ‘반복, 유도, 의견을 강요하는 방식(68.7%)’ 외에 피해자의 평소 품행과 평판(63.7%), 피해자 태도나 행동에 대한 부정적 평가(61%), 피고인 아닌 사람과의 과거 성이력(성경험)을 문제 삼는 질문(54.4%)을 부적절하다고 꼽았다. 반면, 설문에 답한 검사(86.7%)나 피해자 변호사(88.9%)는 피고인 아닌 다른 사람과 가진 과거 성이력을 재판에서 묻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답한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설문에 응답한 판사의 절반 이상(51.7%)은 피해자가 과거 다른 사람과 맺은 성경험을 이유로 한 증인신문은 성범죄 성립 여부와 관련이 없다고 판단해 증인신문을 불허했다고 답했다. 9.1%만이 피해자의 과거 성적 경험이 성범죄 유·무죄 판단에 도움이 됐다고 답했다.
젠더법연구회쪽은 “법조인들은 대체로 피해자의 성범죄 전후 행동, 당시 상황에 대한 묘사 등 성범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요소는 유·무죄 판단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피해자의 평소 품행이나 평판, 피해자의 과거 성이력 등은 범죄 혐의 실체 판단에 덜 관련됐다고 판단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지난 5일 서울 서초구 서울가정법원에서 젠더법연구회 주최로 <미투, 그 이후 - 법정으로 온 성범죄 사건의 쟁점들> 심포지엄이 열렸다. 사진 젠더법연구회 제공.
젠더법연구회는 지난 5일 저녁 서울 서초구 가정법원에서 <미투, 그 이후 - 법정으로 온 성범죄 사건의 쟁점들>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고 이 같은 설문조사 결과를 담은 발표문(성범죄 재판 증인신문의 현실과 피해자 보호규정 도입에 관한 법조인의 인식 - 법조인 대상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을 공개했다. 이날 심포지엄에는 과거 연구회 회장을 지냈던 김영란 전 대법관, 민유숙 대법관, 조경란 특허법원장이 참석했다. 또한 연구회 회원이 아닌 김명수 대법원장도 사전 예고 없이 심포지엄에 깜짝 등장해 참석자들에게 인사말을 전했다. 이날 심포지엄에는 신청인원을 훌쩍 넘는 150명의 판사, 변호사, 검사, 법학교수 등이 참석해 민사·형사 재판으로 넘어온 성범죄 사건에 대한 다양한 쟁점을 논의했다.
현재 국회에는 피해자의 과거 성경험과 관련된 증거를 재판 등에서 배제하는 내용의 법안이 여럿 올라와 있다. 지난해 3월 박경미(더불어민주당) 의원과 2016년 12월 정춘숙(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피해자의 성경험 이력을 증거로 사용할 수 없고 이를 이용하는 수사와 신문까지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을 각각 발의했다. 지난해 11월 인재근(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사건에 한해 성이력에 관한 증거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