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구체적 기억이 없습니다만…”
윤병세(66) 전 외교부 장관이 지난 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재판장 윤종섭) 심리로 열린 임종헌(60)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가장 자주 사용했던 표현이다. 윤 전 장관은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 ‘재판 거래’ 의혹과 관련해 사법부-청와대-외교부로 구성된 ‘삼각 편대’의 한 축을 맡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행정처,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 윤병세 장관의 외교부가 강제징용 재상고심 최종 판결을 지연시키고 재판 결과를 뒤집으려 했다는 의혹이다. 앞서 외교부 실무자급 직원들은 임 전 차장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윤 전 장관이 재판 거래에 깊숙히 관여했다’는 취지로 증언한 바 있다. 이를 증명할 업무일지나 보고서까지 공개됐다. 하지만 윤 전 장관은 이날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해 줄곧 ‘모르쇠’로 일관했다.
■ “그렇게 보입니다” “기억이 안납니다” ‘유체이탈’식 화법
윤 전 장관은 재판 거래 의혹을 뒷받침하는 외교부 문건에 대해 대부분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대법원 판결이 조기에 선고되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적정한 채널을 통해 (대법원이) 신중한 판결을 내리도록 유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문건(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의 함의와 국가적 부담)에 대해서는 “구체적 기억이 없다”고 했다. 외교부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에 보고한 문건(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관련 대응방안)에 대해서도 “많은 문건들이 장관의 허가를 받고 청와대에 보고되는 것이 아니다. 실무자들이 직접 참가하는 경우가 많아서 보고서 자체 내용에 대해서는 기억을 못한다”고 답했다.
대다수 문건이 외교부 ‘실무자’가 작성한 것에 불과하고 자신은 그 내용을 보고받지 않았다는 취지다. 행정처가 외교부에 요구했다는 법관의 해외공관 파견도 실무자가 절차에 따라 결정했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답변만 반복했다. 이때문에 윤 전 장관의 답변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구성됐다. “구체적으로 기억은 안납니다만,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박병대 전 대법관을 만난 사실조차도 명확하게 답변하지 않아 빈축을 샀다. 재판부가 “증인의 대답이 명확하지 않아 묻는다. 박병대 전 대법관을 만난 기억이 있나” 묻자 “정확히 기억은 못하지만 일정표를 보니 박 전 대법관을 만났을 것으로 보인다”는 취지로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윤병세 전 장관은 이른바 소인수회의와 신영철 대법관 논문 헌정식에서 박병대 전 대법관을 적어도 두 차례 만났다. 특히 2014년 10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공관에서 개최된 2차 소인수회의에서 당시 윤 장관은 황교안 법무부장관, 박병대 법원행정처장 등과 함께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 대응방안을 논의했다. 재판부가 “자료에 의한 생각을 묻는 게 아니다. 증인의 기억을 묻는 것”이라며 거듭 질문을 반복지만 윤 전 장관은 끝끝내 명확히 답하지 않았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한겨레> 자료사진
■ 지난해 국감에서도 “기억 안 나” 되풀이, 실무자 증언·문건 보면 ‘글쎄’
윤 전 장관은 지난해 국감에서도 비슷한 태도를 보여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그해 10월26일 국회 외교통상위원회 외교부 종합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기억이 제한돼서 일부 확실하게 말씀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말만 반복했다. 불출석 사유서를 내 출석을 거부하다 ‘동행명령을 발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오후 국회에 모습을 드러낸 뒤다. 당시 1차 소인수회의 참석 여부를 묻는 박병석 의원(더불어민주당)의 질문에는 “기억이 제한돼서 일부 확실하게 말씀하지 못한 부분이 있고 지금 이 시점에서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 상세하게 말씀드리기 쉽지 않다”고 답했고, 2차 소인수회의에 대해서도 “기억이 워낙 희박”하다고만 했다. 의원들은 “윤 전 장관의 머리가 굉장히 좋은 분인데 선택적 기억의 배경이 뭐냐”고 묻기도 했다. 지난 재판에서도 국감에서 보인 ‘모르쇠’를 또 한 번 반복한 셈이다.
그러나 임 전 차장의 재판에 출석한 증인들의 증언은 재판 거래 의혹 당사자로 윤 전 장관을 지목하고 있다. 13일 증인으로 출석한 김규현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정부 의견을 대법원에 보내 문제를 종결하라”는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윤 전 장관에 전달했다고 증언했다. 외교부 실무자 업무일지, 내부 문건을 살펴봐도 그렇다. 2015년 10월3일 윤 전 장관 주재 회의 문건을 살펴보면 외교부가 의견서를 제출해 대법원 판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한 정황이 나온다. 문건에는 “장관(윤 전 장관 지칭) : 지금 초안이라면 대법원측이 지난 번 판결에 문제가 많으니 뒤집어야겠구나 라는 인상을 갖게 하는 정도인지”, “장관 : 공개됐을 때 생각하면 밸런스가 중요함. 타격이 좋으면서 재판 결과가 잘 나와야 함”이라고 적혔다.
■ 이미 공개된 문서인데 “1급 비밀이니 신경써달라” “재판 비공개해달라” 윤 전 장관은 이날 재판 초기에 증인신문을 비공개로 진행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윤 전 장관은 “이 사건은 외교적 측면에서 민감한 기밀 사항들이 포함돼 있다. 국익에 미칠 영향이 우려된다”며 “(외교부) 실무자들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전직 장관이 이야기하는 것이 이해관계가 있는 국가에서 더 비중있게 받아들인다. 경우에 다라 이를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그 사유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미 공개된 문건들을 두고도 윤 전 장관은 “1급 기밀이다. 대외적으로 공개되는 데 각별히 신경을 써달라”며 신문에 거듭 ‘제동’을 걸었다. 윤 전 장관이 문제삼은 문건은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의 함의와 국가적 부담’으로, “입법, 사법, 행정적 차원을 넘어 국가적 차원에서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 “대법원 심리 시에 기존 판결에 대한 재검토 긴요” 등의 문구가 적혀있는 문건이다. 2013년 12월 1차 소인수회의에 참고 자료로 사용된 것으로, 검찰은 윤 전 장관이 이 문건 내용을 김기춘 비서실장, 차한성 법원행정처장 등에게 설명했다고 본다.
이날 윤 전 장관의 증인신문은 오후 3시 시작해 밤 11시16분에 끝났다. 중간에 재판부가 휴정을 요청한 1시간여를 제외하고 검찰과 변호인의 신문이 7시간 동안 진행됐다. 증인신문이 끝난 뒤 윤 전 장관은 “장관이 증언한 것은 아마도 처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실체적인 진실을 밝히려는 재판부 노력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생각으로 참석했고 오늘 가능한 증언을 성실하게 하려했다”며 “법정에서 성실한 증언에 추가해서 역사 앞에 증언한다는 심정으로 섰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한 뒤 퇴정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