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전 서울 성동구 미소페 본사 앞 주차장에서 ‘먹튀 폐업! 미소페 본사 규탄, 고용보장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원정환(52)씨는 지난 14일 ‘16년 일터’를 잃었다. 원씨는 구두 제조업체 ‘미소페’ 하청업체 ㄱ사에서 일하던 제화공이었다. 미소페 여성 구두 가운데 백화점 납품용 드레스화 등을 만드는 ‘7공장’이 문을 연 직후에 들어가 지금껏 16년을 일했다. 신발의 상부인 갑피에 바닥창을 붙이고 밑창·굽·깔창 등을 달아 구두를 완성하는 ‘저부’가 그의 일이었다. 12일 아침 공장에 출근하자 ㄱ사 대표가 갑자기 제화공 19명을 불러모았다. “공장을 닫아야겠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그리고 불과 이틀 뒤 공장은 정말로 문을 닫았다.
원씨를 포함해 ‘7공장’에서 일하다 갑자기 일터를 잃은 미소페 제화공 19명이 24일 아침 서울 성동구 미소페 본사 앞을 기습 점거하고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ㄱ사 대표가 밀린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으려고 ‘먹튀’ 폐업했다”며 “원청인 미소페가 해고 제화공들의 고용을 보장하고 퇴직금도 책임지라”고 요구했다.
지난해 4월 또 다른 구두 제조업체인 ‘탠디’ 제화공들이 본사 점거 농성을 한데 이어, 1년 만에 미소페 제화공들이 다시 점거 농성을 시작한 배경에는 ‘소사장제’가 있다. 성수동에서 수제화를 생산하던 유명 업체들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구두 생산을 하청업체에 맡겼고, 하청업체들은 제화공들에게 개인사업자 이른바 ‘소사장’이 되어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개인사업자가 된 제화공들은 4대보험과 퇴직금을 받지 못한 채 한 켤레당 평균 5500원 가량의 공임비 만을 받았다. 미소페에서 보낸 주문서와 원자재를 받아 회사의 요구대로 구두를 만들었지만,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제화공들은 ‘소사장제’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싸웠고, 원씨를 포함해 700여명의 제화공이 가입한 민주노총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는 지난해 10월 미소페 하청업체들과 단체교섭을 벌였다. 당시 회사와 노조는 4대 보험과 퇴직금 관련 논의를 4월께 하자고 합의했고, 회사 역시 ‘법적인 결정에 따라 퇴직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최근 법원에서 제화공들의 노동자 지위를 인정하는 판결이 잇따르자 회사의 태도가 돌변했다. ‘7공장’에서 일했던 제화공 13명도 하청업체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이 가운데 2명은 지난달 25일 1심 법원으로부터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퇴직금 7000여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정기만 제화노조 지부장은 “묵은 퇴직금은 물론 앞으로도 퇴직금을 줘야 하는 상황이 되자 차라리 공장을 버리자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해고 노동자들을 원청인 미소페가 나서서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진짜 사장은 ㄱ사 대표가 아닌 미소페 본사 사장이다. 미소페는 지난해 8월 하청업체에게 단체교섭에 참여하라고 직접 공문을 보냈고 교섭에도 직접 참여했다”며 “7공장 폐업과 원청인 미소페가 관련이 없다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미소페는 “해당 공장과 거래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하고는 경제적·법률적으로 어떠한 것도 관련되어 있지 않다”며 “폐업 이유는 경영상 이유라고만 알고 있다”고 밝혔다.
글·사진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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