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태연의 우울증 고백 한 달…직장인들은 숨어서 약 삼킨다

등록 2019-07-31 10:47수정 2019-07-31 11:14

우울증 치료기 ‘판타스틱 우울백서’ 서귤 작가 통해서 본 직장인 우울증
정신질환 편견·우려 여전…“대학 갈 때 불리하니 정신과 안돼” 부모도
서귤 작가의 책 <판타스틱 우울백서>의 한 장면.
서귤 작가의 책 <판타스틱 우울백서>의 한 장면.
평범한 8년 차 직장인이면서 동시에 독립출판 작가인 서귤(필명·32)은 기분장애가 있다. 기분 조절이 어렵고 비정상적인 기분이 장시간 지속하는 장애다. 하지만 서귤의 직장 동료들은 서귤의 장애를 모른다. 우울증약과 조울증약을 동시에 복용하는 서귤은 “증상이 심할 때는 일에 집중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안이 몰려와서 어쩔 수 없이 사무실에서 약을 먹어야 할 때가 있었다”며 “그럴 때면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약을 먹었다”고 말했다.

정신과 병원에 진료 가는 날이면 눈치작전은 더 심해진다. 평일 저녁에 문을 여는 정신과 병원이 많지 않아 금요일 오후 4시에 눈치를 보면서 먼저 퇴근하거나 점심시간에 밥을 거르고 병원에 갔다. 휴일인 토요일 오전 진료를 노려보지만, 직장인들의 사정이 대부분 비슷한지라 예약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동료들에게 둘러대는 병명만 늘어났다. “처음에는 감기에 걸렸다고 하거나 치과나 피부과에 가야 한다고 얘기했어요. 나중에는 제가 예전에 앓았던 적이 있는 ‘기쿠치병’(임파선염의 일종)을 많이 팔았어요. 이것저것 둘러대다가 여기에 정착한 셈이죠.(웃음)”

지난달 걸그룹 ‘소녀시대’ 소속 가수 태연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팬들과 대화 도중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 고백하면서 우울증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높아졌다. 당시 태연은 “약물치료를 열심히 하고 있다”며 “조울증이든 우울증이든 쯧쯧, 거리면서 누구 말처럼 띠껍게 바라보지 말아달라. 다들 아픈 환자들”이라고 당부했다. 태연은 왜 굳이 이런 당부를 했을까. 서귤과 같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직장인들이 처한 현실을 보면 답이 보인다.

서귤 작가의 책 <판타스틱 우울백서>의 한 장면.
서귤 작가의 책 <판타스틱 우울백서>의 한 장면.
직장에 다니면서 감정 기복이 점점 더 심해졌다는 서귤은 2017년 말부터 정신과 진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림이 취미인 서귤은 자신의 치료 과정을 만화로 그려 올해 초부터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만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살려 유쾌한 입담으로 약물 복용의 효과 등을 재미있게 풀어냈다. 그러자 곧바로 반응이 왔다. 만화를 올리자마자 모르는 사람들이 디엠(다이렉트 메시지, 쪽지)을 보내서 어느 병원에 다니느냐고 묻기 시작한 것이다. “여전히 정신과 병원에 대한 정보가 막혀 있고, 사람들이 답답해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인스타그램 댓글로도 서귤과 비슷한 경험을 고백하는 글이 올라왔다. “(정신과 진료를 둘러대다 보니)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 됐다”, “둘러댈 병명이 떨어져서 용기 내서 (우울증이라고) 말했더니 ‘웃기지 마, 네가 무슨’ 이런 말을 듣고 소름이 돋았다”와 같은 글이었다. 10대들도 경험을 고백해왔다. “한 고등학생은 부모님이 대학 갈 때 불리하다면서 정신과에 못 가게 한다고 하더라고요. 주변 사람들 시선 때문에 제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하거나 ‘좋아요’조차 누르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한 독자도 있었어요. 이런 독자들을 볼 때마다 너무 속상하고 마음이 아팠죠.”

서귤의 독자들처럼 정신장애에 대한 편견에 고통받는 이들은 현실에 산재해 있다. 특히 직장 상사가 우울증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 부하 직원들은 병가 신청 등에 있어서 곤란을 겪기도 한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한겨레>에 공개한 제보 내용을 보면, 제보자가 상사에게 우울증을 털어놓자 이 상사는 “우울증은 마음을 강하게 먹으면 낫는다”, “사명감이 없다”, “군기가 빠진다”와 같은 말을 하면서 병가 신청을 거부했다고 한다. 앞서 2015년 학술지 <신경정신의학>에 실린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우울증 진단을 받은 직장인 74명 가운데 우울증을 이유로 병가를 내거나 결근한 적이 있는 사람은 23명(31%)에 그쳤다. 특히 이 가운데 신청 사유를 우울증이라고 밝힌 경우는 8명에 불과했다.

전문가들은 우울증 치료는 직장인들의 당연한 권리이고, 치료가 궁극적으로 기업의 이익에도 부합한다고 지적했다. 신영철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소장은 “일부러 못 가게 하지 않아도 직장인들 스스로 걱정하면서 정신과 치료를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며 “우울증은 직장인의 생산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회사 차원에서 빨리 발견하고 도와주면 결국 회사의 이익이 된다”고 강조했다. 신 소장은 “한국식 문화에서 우울증이라고 하면 ‘마음이 약하다’,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덧붙였다.

평범한 8년 차 직장인이면서 동시에 독립출판 작가인 <판타스틱 우울백서> 저자 서귤. 서귤 제공.
평범한 8년 차 직장인이면서 동시에 독립출판 작가인 <판타스틱 우울백서> 저자 서귤. 서귤 제공.
서귤은 지난 5월 인스타그램에 올린 만화를 묶어서 책 <판타스틱 우울백서>를 냈다. 서귤은 지난해 정신과 치료 경험을 에세이로 풀어내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낸 작가 백세희씨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보고 정신과 환자의 ‘제 목소리 내기’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 “이 감정선 너무 적절해” 공감 타고 3쇄 찍은 ‘우울증 치료일기’) 서귤은 “백씨의 책을 기점으로 우울증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내 책 역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서귤은 최근 유튜브 활동도 시작했다. ‘3년 차 환자가 직접 밝히는 정신과 Q&A’ 같은 콘텐츠를 만들어 올린다. 그동안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던 서귤이 회사에 알려질 수도 있음에도 용기 내 유튜브 활동을 시작한 데는 이유가 있다. “처음 인스타그램에 정신과 치료일기를 올릴 때는 그저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댓글, 쪽지 등을 통해 사람들이 편견으로 인해 여전히 힘들어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 사명감이 좀 생겼달까요. 내가 재밌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누군가는 나한테 영향을 받고 아무렇지 않게 우울증에 대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려면 얼굴을 드러내는 게 더 효과적이겠다고 생각했어요.”

서귤은 “정신과 치료받는 사람은 사회의 소수자”라며 “소수자는 그 존재를 드러낼 때라야 권리를 주장하고 편견에 맞서 싸울 수 있는데 지금은 ‘우리 여기 있다’고 말하는 단계 같다”고 말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변화는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 섞인 말이다.

“내 책을 본 누군가가 ‘이거 너무 옛날 이야긴데? 요즘 누가 이래?’ 이렇게 생각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