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회의실 앞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부모 등이 어린이생명안전법안 입법을 촉구하고 있다.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과 부모들은 지난 10월 기자회견을 여는 등 지속적인 관심을 촉구해왔다. 정치하는엄마들 제공
▶문재인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에서 민식이 엄마·아빠의 호소로 어린이생명안전법안들이 주목받고 있다. 민식이법 등 사고로 희생된 아이들 이름을 딴 여러 법안들은 함께 ‘어린이생명안전법’이라고 불린다. 가족들이 눈물로 법안 통과를 호소했지만, 국회의 무관심 속에 방치돼온 법들이다. 어린이생명안전법 통과를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31만여명이 동의한 가운데, 입법을 위해 노력해온 정치하는엄마들 공동대표가 글을 보내왔다.
“오후 심사가 시작되고 10분 만에 소위 합의가 이뤄져 허탈하다. 오는 28일 어린이생명안전법안을 행안위 전체회의에 상정해 심사한다고 했는데, 결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지난 21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소위원회 회의에서 ‘민식이법’ 수정안이 통과됐다. 회의실 밖에서 소식을 들은 태호 아빠 김장회씨는 허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5월15일 인천 송도에서 축구클럽 통학차량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의 이름을 딴 ‘태호·유찬이법’ 역시 발의됐으나 아직 논의되지 않고 있어서다.
‘민식이법’ 법안소위 통과는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에서 조속한 통과에 힘쓰겠다고 답변한 지 불과 이틀 만에 국회가 빠르게 대처하면서 이뤄졌다. 그러나 민식이 가족이 해인이, 하준이, 태호 가족들과 함께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기대하는 바에는 한참 못 미친다. 다른 어린이생명안전법안들이 여전히 방치돼 있어서다.
민식이법이 겨우 법안소위를 통과했을 뿐
해인이 가족 역시 행안위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해인 아빠 이은철씨는 태호 아빠와 함께 어린이생명안전법안 통과야말로 아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여기며 행안위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법안 통과를 촉구하는 서한과 법안 계류 현황을 전달했다. 행안위 심사에 아이들 이름을 단 법안들을 꼭 다뤄달라고 고개 숙여 간절히 부탁한 해인 아빠는 회의장을 나와 벽에 기댄 채 결국 눈물을 쏟았다. ‘해인이법’이 발의된 지 벌써 3년7개월이 지나고 있다.
부모 마음에 늘 다섯살인 해인이는 2016년 4월 경기도 용인시 어린이집 앞에서 하원하던 중 비탈길에 미끄러진 차량에 치인 뒤 바로 이뤄졌어야 할 어린이집의 응급조처가 늦어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8월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 한 ‘해인이법’은 어린이 이용시설 관리 주체 또는 종사자는 해당 시설을 이용하는 어린이에게 위급 상태가 발생한 경우, 즉시 응급의료기관 등에 신고하고 조처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 법안은 지난 3년간 한 차례도 심의된 적 없이 행안위에 계류 중이고, 지난 8월 수정 보완돼 ‘어린이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안’으로 재발의된 상태다.
11월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회의실 앞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부모 등이 어린이생명안전법안 입법을 촉구하고 있다.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과 부모들은 지난 10월 기자회견을 여는 등 지속적인 관심을 촉구해왔다. 정치하는엄마들 제공
“3년 전에 발의만 되고 세상에 나오지 못한 우리 아이 법 때문에 하준이처럼 또 다른 아이들이 희생된 게 아닐까 마음이 너무 아파요.” 해인 엄마 고은미씨는 서울랜드 어린이공원 주차장에서 미끄러져 내려온 차에 치여 숨진 하준 엄마 고유미씨를 만난 뒤 상한 마음을 거두지 못했다.
네살이었던 하준이는 2017년 10월, 서울랜드 동문주차장에서 주차된 차량이 굴러 내려오면서 치여 숨졌다. 사고 이후 경사진 곳에 주차할 때 운전자 의무를 강제하는 ‘하준이법’이 발의됐고, 올해 7월 모든 주차장 관리자에게 경사도 관리 책임과 미끄럼 주의 안내표지판 설치, 고임목 비치를 의무화하는 ‘제2 하준이법’이 발의됐다. ‘하준이법’은 지난해 5월 법제사법위원회 2소위에 회부됐지만 통과가 요원하고, ‘제2 하준이법’은 오는 25일 법안소위 상정이 예정돼 있다.
‘한음이법’은 어떤가. 2016년 7월, 광주 특수학교에 다니던 여덟살 한음이는 고개를 스스로 가누지 못해 통학차량 안에서 늘 세심한 보살핌이 필요했지만, 동행 교사의 방치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8월 권칠승 민주당 의원 대표발의로 어린이 통학버스 안에 시시티브이(CCTV) 설치를 의무화하는 ‘도로교통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됐지만, 역시 3년 동안 심의되지 않았다.
지난 5월, 인천 송도 축구클럽 차량 사고로 여덟살 태호와 유찬이가 세상을 떠났다. 태호와 유찬이가 탔던 통학차량은 노란색 승합차였지만, 법의 적용을 받는 어린이통학차량은 아니었다. 축구클럽은 법적으로 학원도 체육시설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탑승하는 차량은 모두 어린이통학차량이어야 한다는 상식은 깨어졌다.
어린이집·유치원·학원 통학차량 모두 2점식 안전벨트가 안전장치의 전부라는 문제가 있다. 영유아가 자가용을 탈 때는 카시트를 사용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내는데, 통학차량을 탈 때는 2점식 벨트만 매도 합법이다. 어린이통학차량에는 ‘3점식 벨트+부스터’를 의무화하고 사고가 발생할 경우 차량 내부가 보이도록 차 유리의 선팅을 규제해야 한다. 정의당 이정미, 무소속 이용호, 민주당 표창원 의원이 이런 내용으로 각각 대표발의한 ‘태호·유찬이법’은 행안위 등에 회부됐지만, 6개월이 지나도록 방치돼 있다.
지난 9월, 충남 아산에서 스쿨존 내 교통사고로 아홉살 민식이가 세상을 떠났다. 스쿨존은 학교 근처에 지정하는 어린이보호구역이지만, 사고가 난 곳엔 신호등도 과속 단속 카메라도 없었다. 최근 5년간 스쿨존 안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는 4099건으로 13살 미만 어린이 34명이 사망하고 2546명이 다쳤다. 지난 10월 강훈식 민주당 의원, 이명수 자유한국당 의원은 스쿨존 내 신호등, 과속 단속 카메라 설치를 의무화하고, 사망 사고 발생 시 3년 이상 징역형으로 가중처벌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 ‘민식이법’을 각각 대표발의했다.
‘해인이법’ ‘하준이법’ ‘한음이법’ ‘태호·유찬이법’ ‘민식이법’ 모두 생명에 빚진 법안들이다. 사고가 일어나면 의원들은 앞다퉈 법안 발의를 하지만, 정작 20대 국회의 마지막 정기국회 폐회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까지 통과는커녕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약자인 어린이를 위한 정치의 부재
더는 두고 보고만 있을 수 없는 해인이, 하준이, 태호, 민식이 엄마·아빠들은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과 함께 지난달 21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전체 의원실을 개별 방문해 어린이생명안전법안들의 정기국회 통과에 대한 동의서를 전달하고 서명을 촉구했다. 그리고 몇주일 동안 국회의원 사무실에 수차례 전화해 답변을 요구했다. 그러나 전체 국회의원 296명 가운데 법안 처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한 의원은 99명으로, 33%에 그쳤다. 그 답변율을 접한 태호 아빠는 “저런 사람들을 국회에 앉힌 나 자신이 한심하다”고 토로했다.
피해 어린이 가족들은 더는 어떤 어린이도 잃지 않도록 정부와 국회가 최선을 다하라고 목 놓아 외치고 있다. 법·제도의 사각지대에서 희생된 아이들에게 수년째 답을 내놓지 못하는 나라가 저출생을 운운할 자격이 있는가? 이미 태어난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마련하지 않으면서 무슨 염치로 또 낳으라고 하는가? 모든 아이들에게 어린이생명안전법이 필요하다. 이름만 남기고 떠난 우리 해인이, 하준이, 한음이, 태호·유찬이, 민식이에게 정부와 국회는 고개 들어 해명해보라. 국가는, 정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수년간 위 법안들을 방치하는 동안 우리 사회가 지키지 못한 아이들을 생각해보라.
김정덕 정치하는엄마들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