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의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광주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 5월22일 새벽 1시49분께. 전북 전주시 덕진동에 있는 전북도경찰국 제2기동대 상황실에서 근무하던 당시 22살 김상회씨는 강원도 양양군에 살던 누나에게 8일 전 벌어진 전북대학생들의 시위와 관련해 편지를 썼다. ‘지난 14일 이곳 전주에서도 굉장했었는데 우리 부대가 얼마나 살벌하게 죽여놓았는지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고나 할까? 정말 처참하고 비극적인 광경들이 벌어지고 또 우리 자신들이 만들어 냈었어’라는 내용이었다. 김씨는 이 편지를 이날 아침 8시30분께 소속대 인근 우체통에 넣어 발송했다.
전날 밤 10시30분께, 김씨는 내무반에서 소속대 대원들과 함께 우연히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한 북한의 대남 방송을 듣게 됐다. 그리고 이 내용을 바탕으로 강릉에 거주하는 동생에게 ‘북한 방송을 들으면 왜곡·과장한 사실도 있지만 사실적 근거는 있는 것이 많을 것이라’라는 내용으로 북한의 대남 방송 청취를 권유하는 편지도 함께 썼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한국의 어떤 언론도 제대로 보도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 편지들은 결국 누나와 동생에게 닿지 못했다. 당시 호남 지역에서 발신되는 모든 편지는 검열 대상이었다. 김씨는 결국 반공법 위반 등으로 조사를 받게 됐다. 광주 상무대 영창으로 이송된 그에게는 구타가 이어졌다. 1980년 8월8일 전투교육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는 김씨에게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대법원에서 같은 판결이 확정됐고, 김씨는 독방에서 1년을 보냈다.
반공법 위반 확정 판결과 수감 경력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업은 번번이 좌절됐다. 수감 당시 스트레스에 따른 안면마비 증상도 왔다. 12년 동안 일본에서 유학했지만, 안면마비 증상으로 공부를 마치지도 못했다.
김씨가 재심을 결심한 걸 2016년이다. 광주시청은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의 7차 보상을 위해 김씨에게 연락을 했고, 심의를 거쳐 그는 지난해 민주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이에 김씨는 올해 8월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그의 당시 행동이 5.18 직후에 이뤄진 정부 조처에 대해 의견을 표명한 것이라고 판단해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서울동부지법 형사합의12부(재판장 민철기)는 지난 12일 김씨의 재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미 폐지된 반공법으로 김씨를 처벌한다고 해도 반국가단체 등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동조하거나 이를 이롭게 한다는 인식이 있어야” 하는데 △김씨가 전북대생 시위를 접한 뒤 광주 관련 뉴스를 들으려 했으나 한국의 방송사에서는 이를 방송해주지 않았고 우연히 북한 방송을 듣게 돼 그 사실을 동생에게 알리기 위해 편지를 쓴 점 △편지 내용 또한 북한의 이념적 정치적 활동에 대한 것이 아니라 광주 상황에 초점이 맞춰진 점 △편지에서 북한 방송에 왜곡·과장된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는 취지도 함께 기재한 점 등을 비춰볼 때 반공법 위반 혐의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봤다. 재판부는 아울러 “설령 김씨에게 북한에 동조하거나 이를 이롭게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해도, 김씨의 행위는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행위 또는 (전두환 신군부의) 12.12 사태와 5.18민주화운동을 전후해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하는 행위로서,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행위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오연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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