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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혐오가 퍼질 때

등록 2020-01-31 19:47수정 2020-02-01 02:02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일본 드라마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

1970년 7월 10살 소년 가쓰마사는 자신의 진짜 성이 야스다가 아니라 안(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재일한국인이라는 편견에 시달려왔던 아버지는 가쓰마사에게 늘 ‘성공해서 나라에 기여하라’고 강조해왔다. 가쓰마사는 처음으로 정체성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의과대학에 진학한 그는 다른 전문 분야를 선택하라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며 정신과를 선택한다. 그에게는 오직 인간의 마음이 가장 흥미로운 탐구 대상이었다. 1995년 1월17일 한신·아와지 대지진이 일어난다. 고베대 부속병원 소속이던 가쓰마사는 피난소를 찾아다니며 생존자들의 상처를 돌보기 시작한다.

일본 <엔에이치케이>(NHK)가 한신·아와지 대지진 25주년을 맞아 제작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원제 ‘心の傷を癒すということ’)은 당시 재난 피해자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한 재일동포 의사 안 가쓰마사(1960~2000)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개념에 대해 대중이 거의 알지 못하던 시대에 안 가쓰마사의 진료는 큰 반향을 불러왔다. 드라마의 제목은 그가 당시의 진료 활동을 담아 펴낸 동명의 저서에서 따왔다. 저서는 학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고, 안 가쓰마사는 이후 일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연구의 선구자로 존경받게 된다.

드라마는 가쓰마사가 자신의 출신을 깨닫는 시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수자라는 정체성은 그가 인간의 마음에 주목하는 계기가 된다. 항상 강하고 엄해 보였던 아버지의 모습 뒤에 차별의 두려움이 숨어 있듯, 인간은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연약한 존재다. 인간에 대한 이런 섬세한 이해는 훗날 가쓰마사가 재난 현장에서 마주치는 편견과의 싸움에서도 큰 힘을 발휘한다.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데 마음을 신경쓸 여유는 없다는 생각, 정신장애인도 아닌데 정신과 의사 도움은 필요 없다는 인식 등으로 가득한 현장에서 가쓰마사는 그 굳은 표정 뒤의 불안과 상처를 읽는다.

이 작품이 더 인상적인 것은 가쓰마사의 활약을 따라가면서도 영웅담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대한 인물이 위기의 공동체를 구원하는 전형적인 재난물 플롯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비극을 대하는 이들의 다양한 반응과 상처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잃어버린 아이의 신발을 붙들고 울부짖는 한 아버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다가 회의를 느끼는 기자, 동네에서 혼자 살아남은 죄책감에 삶의 의미를 잃고 남은 재산을 탕진하려는 남자 등 가쓰마사가 만나는 인물들의 마음 하나하나가 구겨진 습자지를 조심스럽게 펼치듯 신중하게 묘사된다.

공교롭게도 또 하나의 거대한 재난이 전 지구를 뒤덮고 있는 시대에 드라마의 의미가 더 각별하게 다가온다.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혐오가 빠르게 퍼지는 와중에도 피해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목격하면서, 누구보다 인간의 마음을 잘 들여다봤던 재일한국인 의사의 믿음을 떠올린다. ‘인간은 연약하기에 타인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그렇기에 서로 도울 수 있다.’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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