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10살 꼬마와 그 내면의 히틀러 사이의 위험한 대화

등록 2020-02-01 11:20수정 2020-02-02 16:54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조조 래빗>

소년 조조의 절친 내면의 히틀러

어른들 안에 숨은 파시즘의 씨앗
내시경으로 발현 경로 보여주듯

인종적 편견의 바보스러움 설교
체코 소도시 촬영, 비주얼 더해
나치 영화의 식상함 ‘한계’ 갇혀
&lt;조조 래빗&gt;은 나치-홀로코스트 영화의 식상함을 극복하기 위해 주인공인 10살짜리 히틀러유겐트 소년 조조의 시점을 새로움으로 내놓는다. 조조(오른쪽)와 조조 내면의 목소리인 히틀러가 함께 뛰는 장면. &lt;조조 래빗&gt; 페이스북
<조조 래빗>은 나치-홀로코스트 영화의 식상함을 극복하기 위해 주인공인 10살짜리 히틀러유겐트 소년 조조의 시점을 새로움으로 내놓는다. 조조(오른쪽)와 조조 내면의 목소리인 히틀러가 함께 뛰는 장면. <조조 래빗> 페이스북

할리우드가 존재하는 한 그 명맥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논외로 하더라도, 장구한 역사와 규칙적인 제작 편수, 꾸준한 수상 후보 진입으로 볼 때, 나치-홀로코스트 영화는 아예 아카데미상 단독 부문으로 독립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게 마냥 쉽지만은 않겠다 싶기도 하다. 나치 및 제3제국의 몰락으로부터 어언 70여년이 지난 지금(올해로 벌써 75년째다) 과연 어떤 새로운 것이 더 나올 수 있을 것인지라는 문제가 엄존하므로. 하지만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조조 래빗>은 주인공인 10살짜리 히틀러유겐트(나치스 독일의 청소년 조직) 소년의 시점을 새로움의 핵심으로 내놓는다. 조조 베츨러(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아리안족 선민의식에 푹 절여져 할아버지가 금발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극복하는 데 석달이 걸렸을 만큼 열광적인 히틀러유겐트다. 그는 최고 절친의 자리를 총통 각하를 위해 비워두는 것으로도 모자라 실제로 총통 각하를 최고 절친한 친구로 두고 있다.

10살 조조의 머릿속에 사는 상상 속 히틀러(감독인 타이카 와이티티가 직접 연기)는, 조조에게 “네가 (전쟁터에서 이탈한) 너희 아빠처럼 겁쟁이가 아니라면 토끼의 목을 비틀어 죽여봐”라며 히틀러유겐트 선배가 내민 토끼를 죽이지 못해 ‘조조 래빗’이라는 별명을 얻고 괴로워할 때도, 겁쟁이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훈련 교관인 클렌첸도르프(샘 록웰) 대위가 들고 있던 수류탄을 갑자기 낚아채 투척 지점으로 돌진할 때도, 죽은 누나 방의 비밀공간에서 숨어 지내던 유대인 소녀 엘사(토머신 매켄지)를 처음 발견했을 당시 충격을 다독일 때도, 그리고 냄비 철모를 쓴 채 그 ‘유대인 괴물’과 다시 대면할 때도 항상 조조의 곁에 머물며 나치 된 자로서의 자세와 나아갈 바를 일깨우고 독려한다. 또는 조조와 함께 쫄보가 되어 연신 조조에게 담배를 권한다.

그러니까 <조조 래빗>이 자신만의 차별점으로 삼고 있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스러운 일인칭 시점은, 그 일인칭 시점의 주인공인 조조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히틀러(=조조 내면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한번 보강되고 있다. 즉 <조조 래빗>이 취하고 있는 시점은 이중으로 주관적이다. 이것이 언뜻 가해자 나치에서 피해자 유대인으로 진영만 바뀐 닮은꼴로 보이는 <인생은 아름다워>와 <조조 래빗> 사이에 놓인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인생의 아름다워>의 판타지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실제 대화로 만들어지는 것과는 달리 조조와 상상 속 히틀러가 나누는 대화는 어디까지나 독백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히틀러는 히틀러가 아니라 ‘히틀러 모양을 한 어떤 것’이다.(그래서인지 일단 외관부터 <조조 래빗>의 히틀러는 영화 사상 히틀러와 가장 닮지 않은 히틀러로 기록되기에 손색이 없다.)

숨은 파시즘의 씨앗

<독재자>부터 <바스터즈>까지, 거의 모든 나치-홀로코스트 영화 속 히틀러가 매우 엄밀히 말해 ‘히틀러 모양을 한 어떤 것’임을 고려한다면 이는 흠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이 대목은 찬스, 즉 10살짜리 꼬마의 머릿속에 파시즘이 어떻게 자리잡고, 어떻게 작동하며,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효과적인 내시경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종종 10살 어린이에게조차 어이없게 들리는 조잡한 선동에 한 몸 흔쾌히 내던지곤 하는 우리 어른들 안에 숨은 파시즘의 씨앗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훌륭한 장치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조조 래빗>은 자신의 히틀러에게 그저 단타성 조크와 조롱, 그리고 희화화를 위한 샌드백이라는, 손쉬운 재래식 역할만을 맡기는 데 그친다. 예컨대 10살짜리 조조에게 계속해서 담배를 권하다가 한 소리 제대로 듣는다든가, 유대인 소녀 엘사를 맞닥뜨린 직후 “저 제시 오언스이자 잭 더 리퍼인 여자 유대인을 어쩔까… 집을 태워버리고 처칠이 했다고 뒤집어씌워버리자” 같은 해결책을 제안한다든가 등등. 더구나 이 개그들은 아무리 유아적이라도 처음부터 퇴로가 마련돼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10살짜리의 상상일 뿐’이라는 퇴로 말이다.

<조조 래빗>이 ‘인종적 편견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것인지 알려주마’ 풍의 선한 의도 가득한 교육적·계몽적 조크를 다른 캐릭터들로 확대할 때, 영화는 퇴로 없는 식상함의 수렁에 본격적으로 빠져든다. 영화에 등장하는 3명의 히틀러유겐트 교관 중 유일한 여성이자 가장 단순무식한 골수 쪽에 해당하는 캐릭터인 람(레벨 윌슨)은 삼촌이 술독에 빠지고 도박쟁이가 되고 바람을 피우고 조카와 놀아나다 익사했는데 “이건 전부 유대인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와 정반대의 입장, 그러니까 흡사 안네 프랑크의 입장에 놓인 유대인 소녀 엘사는 “유대종족의 모든 걸 털어놔”라는 조조의 요구에 “물론 돈을 좋아하는 악마”로 시작해 “음식 알레르기가 있어서 신선한 고기, 치즈, 빵 같은 걸 먹으면 즉사하지” 같은 농담으로 놀린다. 조조는 “유대 여왕이 알 낳는 장소를 불어. 유대인이 있는 곳을 지도로 그려”라고 계속해서 요구하고, 엘사는 조조의 얼굴(보다는 머리)을 그려 건넨다.

이런 식으로 <조조 래빗>은 인종적 편견의 바보스러움에 대해 계속 설교한다. 그 설교는 종종 무척 재미있긴 하지만(예컨대 나치 경례인 ‘하일 히틀러’ 복창 조크 같은), 75년이 지난 지금 10살 미만 어린이조차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지당한 말씀의 반복임에는 변함이 없다.

더구나 엘사가, 조조가 늘어놓은 아리안 민족의 역사와 우수성에 맞서 “우리 유대인들은 천사와 싸웠고, 거인을 쓰러뜨렸고, 신에게 선택받았고” 등등의, 바그너라도 배경음악으로 깔아야 할 것 같은 대사로 맞불을 놓을 때, 그리고 그 제2편 격으로 각종 유명인의 이름을 줄줄 나열하며 이 (대단한) 사람들이 모두 유대인이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할 때, 우리는 심지어 엘사에게서도 조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종주의적 파시즘의 씨앗을 본다. 물론 이 부분은 조크인 듯 조롱인 듯 모호한 톤으로 처리되어 있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최소한 아무런 유쾌함이나 예리함 없는 조크이자 조롱임에는 변함이 없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이 할리우드 진출 전 만든 &lt;헌트 포 더 와일더피플&gt; 같은 작품에서 보여준 참신함과 개성이 &lt;조조 래빗&gt;에도 살아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lt;조조 래빗&gt; 페이스북 갈무리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이 할리우드 진출 전 만든 <헌트 포 더 와일더피플> 같은 작품에서 보여준 참신함과 개성이 <조조 래빗>에도 살아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조조 래빗> 페이스북 갈무리

예정된 조조의 개과천선

이 영화에서 의외의 순간을 안기는 인간적인 캐릭터는 나치 유겐트 교관 노릇에 잔뜩 염증을 느끼고 있는 듯 냉소적인 클렌첸도르프 대위, 그리고 자유분방한 유머 감각과 인간적 온기를 품은 조조의 엄마 로지(스칼릿 조핸슨), 두 캐릭터이겠다. 특히 로지는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전개를 제공하는 인물인데, 그 전개 역시도 충격 효과를 노린 듯 너무 돌연한 나머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조조의 개과천선을 위한 막판 부스터라는 인상 이상은 남기지 못한다.

그렇다면 로지의 화려한 의상을 비롯해 시각적인 부분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할까. 물론 옛 유럽의 정취가 남아 있는 체코의 소도시들에서 촬영했다고 하는 이 영화의 비주얼은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웨스 앤더슨의 영화, 특히 <문라이즈 킹덤>을 아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의 전반부를 거의 <문라이즈 킹덤>의 나치 독일 버전으로 느낄 것이다. 물론 수평 수직선을 강조한 좌우 대칭 구도와 수평 트래킹, 동화 일러스트 풍의 미술 등 웨스 앤더슨적 시각요소를 그대로 도입하고 있는 <조조 래빗>에서는, 정작 <문라이즈 킹덤>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개성 넘치는 캐릭터와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전개, 그리고 그 엉뚱함을 충분히 납득시킬 만큼 설득력 있는 정서적 보상 같은 것은 발견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그래서 진심으로 아쉽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이 할리우드에 본격 진출하기 이전의 작품들, 특히 이 영화와 가장 가까운 연장선에 있는 <헌트 포 더 와일더피플> 같은 작품이 보여줬던 참신함과 개성이 그대로 이 영화에 살아났더라면 <조조 래빗>은 놀라운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나치 영화’가 아닌 ‘반증오 영화’를 만듦으로써 인종주의를 앞세운 극우들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오늘날 나치-홀로코스트 영화의 의미를 새로이 되살리겠다는 감독의 선의는, 너무나도 익숙한 나치-홀로코스트 영화의 범위를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채 늪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고 말았다.

하여 이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반나치’가 아니라 ‘반증오’라면 왜 굳이 나치-홀로코스트여야 했는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나치-홀로코스트에 유독 관대한 아카데미상의 성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일부 해외 평에서 이 영화를 두고 ‘소재에 대해 지나치게 안전한 접근’이라고 지적했던데, 지나치게 안전했던 것은 소재에 대한 접근이 아니라 소재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조 래빗>은 자신을 가장 큰 위험에 몰아넣고 말았다. 통찰부터 비주얼까지, 새로울 것은 아무것도 없는 영화가 되는, 영화가 빠질 수 있는 가장 큰 위험에 말이다. 한동원 영화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