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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잘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나는 그냥 네가 좋아”

등록 2020-02-15 14:48수정 2020-02-15 14:53

[토요판] 김선희의 학교 공감일기 ② 존재의 소중함
오랜 세월 구겨진 마음조차 잠시 닿은 따스한 눈길에 활짝 꽃피워내는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의 희망이 바로 아이들에게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오랜 세월 구겨진 마음조차 잠시 닿은 따스한 눈길에 활짝 꽃피워내는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의 희망이 바로 아이들에게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선생님, 뭐 도와드릴 거 있을까요?” 중1 은정(가명)이는 만날 때마다 어김없이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한 뒤 동그란 눈으로 묻곤 했다. 수업시간의 무기력한 눈빛과는 다르게 기운 차 보였다. 특히, 무거운 물건을 들고 있을 때 어디선가 ‘짠’하고 나타나 거들어주니 여러 번 도움을 받기도 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인적 드문 복도를 지나가다 마주 오는 은정이를 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은정아” 부르니 역시 깊이 인사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그 책들 제가 들어 드릴게요.” 은정이의 두 손은 이미 내가 들고 있던 몇 권의 교재에 닿아있었다. “아냐, 그냥 반가워서 부른 거야” 나는 답했다. 그 말을 들은 아이의 표정은 왠지 어둡고 불편해 보였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선생님, 그래도 제가 들어 드리면 안될까요?” 다시 물어왔다. 그래서 “꼭 돕고 싶구나” 하며 책을 건넸다. 아이는 그제야 조금 안심 어린 표정으로 교무실 문 앞까지 동행하곤 급히 몸을 돌렸다. 그날따라 유난히 안색이 좋지 않고 불안해 보여 담임교사를 찾아가 사정을 물었다.

“은정이는 알코올 중독 아버지로 인한 폭력적인 환경에서 어렵게 살고 있어요. 어머니도 생활고로 잘 돌보지 못하니 기초학습능력이 많이 떨어져요.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요. 몇몇이 먼저 다가가는 데도 관계에 대한 자신감 부족인지 그 곁에 있으려 하지를 않아요.” 담임교사는 은정이에 대해 여러모로 마음을 쓰고 있었다.

“아, 그랬군요. 가정 안에서 자기 존중감을 충분히 확인하며 성장하기 어려웠던 것 같네요.” 내 생각을 말했더니 담임교사도 안타까워했다. 복도에서 나를 돕고자 했던 은정이의 행동을 떠올리며 내가 말했다. “은정이가 좀 더 안전한 어른들 곁에서 잘할 수 있는 일로 인정받고 싶었나 봐요.” 담임교사도 비슷한 경험과 같은 생각을 한다고 했다.

얼마 후 교무실 주변을 맴돌던 은정이를 다시 만났다. 역시나 내 손에 대신 들어줄 물건이 있는지부터 살폈다. 나는 아이가 쓸모있는 사람으로서의 자기 존재 의미를 확인하는데 앞서, 존재 자체의 소중함을 먼저 깨닫길 바랐다. 그래서 눈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진심을 다해 말했다. “은정아, 선생님이 너를 만나 반기는 건 네가 나를 도와주리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야. 도와주지 않아도 난, 그냥 네가 그냥 좋아.” 그러자 아이도 “아, 네” 하며 조금 긴장이 풀어지는 듯 엷은 미소를 보였다.

그 후로 아이는 내 앞에서 더 이상 긴장하지 않았다. 밝은 얼굴과 동그란 눈으로 괜찮아 보이려 가장하지도 않았다. 힘들 땐 힘든 얼굴로, 기분 좋을 땐 기분 좋은 모습 그대로였다. 점차 각 잡힌 인사 대신 표정과 손짓으로 반가운 마음을 주고받곤 했다.

다음해엔 복도나 교무실에서 만날 기회가 줄었다. 그해에는 은정이와 같은 학년 수업을 담당하지 않아서 자주 못 보게 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곧 은정이가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과 교실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꽤 오랜만에 학교축제 무대에서 졸업반이 된 은정이를 다시 만났다. 몇 명의 아이들과 어울려 장기자랑 무대에서 댄스와 노래로 당당하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제는 위축되고 불안했던 예전의 은정이가 아니었다.

문득 고마운 마음에 가슴이 뭉클했다. 무대 뒤로 퇴장한 은정이 곁에 슬쩍 다가가 말을 걸었다. “넌 어쩜 그리 확실하게 멋지니?” 아이는 온전히 신뢰하는 함박웃음을 보이며 하이파이브를 날리고 멀어져갔다. 아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내 가슴도 절로 쫙 펴졌다.

각박한 능력주의 사회에서 우리 모두 비교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끝도 없는 긴장으로 위축돼 떨곤 한다. 그러나 어쩌면 세상을 잘 살아가는 데 그토록 많은 능력이 필요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자기 존재의 고유한 소중함을 느낄 수만 있어도, 서로의 소중함을 알아만 주어도 지금보다 훨씬 더 살맛 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햇빛만 닿아도 얼마나 예쁜지!’(가수 시와의 노래 ‘작은 씨’ 중)

오랜 세월 구겨진 마음조차 잠시 닿은 따스한 눈길에 활짝 꽃 피워내는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의 희망이 바로 아이들에게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오늘도 나는 수도 없이 나 자신과 아이들에게 말한다.

“잘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나는 그냥 네가 좋아”

▶김선희 교사. 경기도 내 중고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25년차 교사이자, 가정과 학교에서 미래의 주역들과 함께 성장해가는 삐뚤빼뚤 민주주의자다. 단 한 존재도 학교에서 입시 성적으로 매겨진 등급과 서열로 인해 함부로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 당하지 않는 세상을 기도하며 따뜻한 공감의 시선을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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