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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마음의 허기를 달래줄, ‘믿음’이라는 보양식

등록 2020-03-13 19:40수정 2020-03-14 09:22

[토요판] 김선희의 학교 공감일기

④ 어른의 획일적 틀

어른들 마음대로 정해놓은 획일적인 틀에 얽매여 치이고 다친 상처가 깊은 아이의 말일수록 더 많이 들어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어른들 마음대로 정해놓은 획일적인 틀에 얽매여 치이고 다친 상처가 깊은 아이의 말일수록 더 많이 들어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선생님, 저기 애들 선생님 반 맞나요?”

어느 날 오전, 학부형 한분이 찾아와 복도 끝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반 정선(가명)과 윤지(가명)가 잔뜩 화가 치민 듯 허공을 쏘아보며 고개를 돌린 채 서 있었다. “사정이 있어 외출을 했다는데 담임선생님 지도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분은 짙은 화장과 짧은 치마로 한껏 치장한 두 아이의 겉모습이 꽤나 문제 있어 보였던 모양이다.

일단 수업에 들여보냈다가 쉬는 시간에 아이들을 다시 만났다. “아까는 급한 사정이 있었니?” 아이들은 입을 꾹 다문 채 눈길도 주지 않았다. “샘한테 말해주기가 싫은가 봐?” “딴것도 아니고 군것질이나 하러 나간 건데, 샘이 이해를 해주겠어요?” 정선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 그렇구나. 간식 사 먹으러 외출을 한 건 이해받기 어려울 것 같았구나.” 나는 아이들의 마음을 다시 읽어주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간식 사 먹기 위해 외출하는 게 나쁘다고 생각되니?” 내가 묻자 이번엔 윤지가 발끈했다. “간식 사 먹는 게 왜 나빠요? 배가 고프면 집중도 안되잖아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샘한테 외출증을 받을 수 있지 않나?”

“그런 얘기 해봤자 엄마한테 전화나 하시겠죠. 그럼 엄마는 화장하다 늦어서 밥 못 먹은 거라며 화장까지 못 하게 참견할 거고요. 이럴 땐 그냥 입 딱 닫고 벌칙이나 받는 게 훨씬 속 편해요.”

“아, 그간 그런 일을 꽤 겪었구나. 말하기 싫을 만도 하네.”

내가 이렇게 말하자 두 아이가 멈칫 서로의 눈을 보더니 내 눈치를 다시 살폈다. “그런데 대화도 해보지 않고 너희들에게 불신당한 거 같아 나는 좀 서운한 마음도 든다.” 솔직한 마음을 전했더니 적극적으로 따졌던 윤지가 미안했는지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샘이 나빴다는 게 아니에요. 학교 규정도 있고 준비물이나 과제물을 놓고 온 것도 아닌데 어느 선생님이 허락을 해주겠어요?” “그럼 준비물을 산다고 말하고 외출증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어?” 내 물음에 윤지는 “그건 거짓말이잖아요”라고 한다. “아, 그렇구나. 몰래 나갈지언정 선생님을 속이는 건 싫었구나?”라고 다시 물었더니 두 아이가 동시에 “네”라고 답했다.

아이들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나 또한 아이들의 마음이 곱게 느껴졌다. “외출을 규제하는 규정과 외출증 발급에 관한 판단 기준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점이 참 많네.” 아이들은 경계를 풀고 신난 듯 앞다투어 건의 사항을 말했다. 나는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꼭 의견을 전하겠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규정이 바뀌기 전까지는 급한 일로 외출이 필요할 때 먼저 의논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흔쾌히 약속했다. 그날 학년부에서 정한 벌칙도 성실히 수행했다.

며칠 뒤 조회를 마치자 윤지가 괴로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늦잠 자서 아침을 못 먹고 왔더니 배가 너무 고파요. 따뜻한 컵라면 사 먹고 올게요.” “그래, 쉬는 시간이 짧아 수업에 늦을까 봐 좀 걱정은 되지만 넌 특별히 믿음직하니 도와줄게.” 나는 외출증을 써주었다. 그런데 쉬는 시간에 교실에 가보니 아이는 나가지 않고 친구들과 놀고 있었다. “외출 안 했니?” “혹시라도 수업에 늦으면 샘이 난처하실 것 같아서요.” 윤지는 찡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순간 아이와 나 사이에 끈끈한 연대가 형성된 걸 느꼈다. 그 뒤 1년 동안 윤지는 그 누구보다 다정하고 친밀한 나의 지원군이 돼주었다.

창의적이고 신체 에너지가 넘치지만 책상에 각 잡고 앉아 있는 것만은 어려웠던 윤지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어른의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에 시달려왔을까. 꼼수가 아니고는 도저히 자기 욕구를 충족할 수 없었으니 늘 일탈을 노리는 반사회적인 아이로만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속마음을 통해 만난 진짜 윤지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의리도 있는 매력적인 소녀였다. 윤지에게 정작 필요했던 것은 육체적 허기를 달래줄 컵라면이 아니라 ‘넌 특별히 믿음직해’라는 마음의 보양식이 아니었을까.

어른들 마음대로 정해놓은 획일적인 틀에 얽매여 치이고 다친 상처가 깊은 아이의 말일수록 더 많이 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그의 특별함을 발견하고 인정한다면 기성세대의 좁은 시야가 확장될 뿐만 아니라 에너지 넘치는 젊은 동반자를 얻게 될 것이다. 충분히 공감받은 아이는 놀랍도록 품위 있고 건강해진다. 그런데도 여전히 문제가 계속된다면 그것은 아이의 마음을 충분히 들으려 하지 않은 경직된 어른들과 이 세상이 가진 폭력적인 틀이 견고한 탓일 것이다.

▶김선희 교사. 경기도 내 중고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25년차 교사이자, 가정과 학교에서 미래의 주역들과 함께 성장해가는 삐뚤빼뚤 민주주의자다. 단 한 존재도 학교에서 입시 성적으로 매겨진 등급과 서열로 인해 함부로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 당하지 않는 세상을 기도하며 따뜻한 공감의 시선을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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