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선희의 학교 공감일기
⑦사람을 살리는 단 한마디의 말
⑦사람을 살리는 단 한마디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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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친한 친구도 없고 늘 힘들었어요. 중학교 1학년 때 왕따까지 당했고요. 한번은 집 옥상으로 올라갔는데 차마 뛰어내릴 수 없었어요. 그때 용기 없는 제가 싫어지면서 자해를 하게 된 것 같아요.” “이렇게나 힘들어진 건 언제야?”
“초등학교 1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부모님한테 힘들다고 말하면 ‘언제까지 슬퍼만 할 거냐. 네가 잊고 공부 열심히 해야 할아버지도 하늘나라에서 좋아하신다’고 말했어요. 막내 고모는 ‘아버지를 잃은 나도 이렇게 잘 이겨냈는데 넌 부모님 다 계시면서 왜 그리 엄살이냐’고도 말했어요.” “그때 네 마음은 어땠어?”
“어른들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슬픔을 누르려고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어요. 그런 제가 못나게 느껴졌어요.”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 대한 해수의 마음은 어땠었니?”
“친척 언니, 오빠들은 초등학교 가기도 전에 한글을 다 떼고 구구단도 줄줄 외웠어요. 부모님은 그러지 못한 저를 부끄러워했죠. 친척들도 만날 때마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만 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제가 공부를 잘하지 못해도 진심으로 사랑해주셨어요.” “그렇구나. 할아버지는 해수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셨구나.”
“네, 맞아요.” “그런데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슬픔을 아무도 몰라주니 무척 외로웠겠다.”
“네, 위로를 받고 싶은데 ‘제발 그만 좀 하라’는 말만 들었어요. 그래도 얼마 전 에스엔에스(SNS)에서 저를 이해해주는 어른을 찾았어요. 그래서 실제로도 만나보고 싶은데, 좀 두려워요.” “어떤 점이 두려워?”
“제가 보잘것없는 아이라는 걸 알게 될까 봐요. 그 오빠도 고등학교 때까지 자해를 했지만 스스로 극복했대요.” “너도 자해를 멈추고 싶구나?”
“네, 하지만 저도 모르게 다시 하게 되니 한심하게 느껴져요.” 아이는 여러 줄의 면도칼 자국이 난 손목을 보여주었다. “해수야, 네가 할아버지를 잊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거야. 더 오래 슬퍼해도 되고 평생 그리워해도 돼. 언제까지 슬퍼할지는 아무도 정해줄 수 없는 거야. 슬픈 마음이 들면 언제든 찾아와.” 이튿날 아이의 사연과 그대로 닮은 그림책 <마음이 아플까봐>(올리버 제퍼스)를 권했다. 며칠 뒤 아이에게 물었다. “읽고 나니 마음이 어때?”
“이야기 속 소녀와 제가 비슷해서 놀랐어요.” “그 소녀는 언제 마음이 괜찮아진 것 같아?”
“어른이 되어서 작은 소녀를 만난 뒤부터 괜찮아진 것 같아요.” “그렇지? 어쩌면 그 작은 소녀는 네 슬픈 마음을 궁금해하는 나, 또는 할아버지를 잃고 슬픔에 빠졌던 어린 시절의 네 마음일지도 모르겠어. 이제 넌 혼자가 아니야. 홀로 외롭고 슬펐던 마음을 다 떠올리며 충분히 이야기해보자. 지금 마음은 어때?”
“할아버지를 잊지 못하고 슬퍼한 제가 부끄럽지 않아요. 외롭지도 않고요.” “그렇다면 다음주에 만나기로 했다는 그 오빠를 굳이 만날 필요가 있을까? 네가 혼자서 모르는 어른과 만난다는 게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걱정이 돼.”
“저도 왠지 불안했어요. 약속은 취소할게요.” 아이의 표정은 밝고 힘찼다. 이듬해 고등학생이 된 해수가 새로 사귄 친구와 밝은 모습으로 찾아왔다. 자해를 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며 뽀얀 손목을 내밀어 보였다. 아이가 힘든 마음을 표현할 때 곁에 있는 어른이 좀 더 깊이 궁금해했으면 좋겠다. 아이 스스로 자기 아픔을 바닥까지 드러낼 수 있도록 한겹 한겹 구체적으로 묻고 집중해서 듣기를 바란다. 충분히 정확하게 듣겠다는 마음이 없이 피상적으로만 묻고 성급히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 하면 아이는 자기 고통의 핵을 찾기 어려워 오래도록 징징거릴 수밖에 없다. 일부는 자신을 해하고 일부는 불안 심리를 먹잇감으로 삼는 사회의 어둠 속에 무작정 손을 뻗어 구원을 바라기도 한다. 부디 당신 한 사람만은 마음이 힘든 아이의 에스오에스(SOS)에 훈육으로 답하는 잔인한 어른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이는 그저 단 한 사람이라도 안전한 어른이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함께 있어주기만을 원할 뿐이다. 그 어떤 순간에도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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